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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토리 나무    
글쓴이 : 조헌    12-12-07 07:49    조회 : 4,691
 
도토리 나무

                                                                       조      헌

 연전(年前)에 부모님을 위해 서울 근교 작은 마을에 농가주택을 마련했다. 연세도 많으시고 줄곧 서울서 생활하셨기 때문에 걱정과 망설임도 많았지만 과감히 결정하게 된 까닭은, 우선 도시에서의 건조하고 무료한 생활보다는 좀 더 활동적이고 여유로울 수 있으며, 다소나마 소일거리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점점 쇠약해지시는 두 분의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이 큰 몫을 하였다. 다행히 그 결정은 옳았다. 농촌의 싱그러운 자연은 씨앗과 젊은 나무만을 틔우고 기르는 것이 아니고, 고맙게도 고목의 마른 등걸에서도 여린 잎을 키우고 묵은 가지에서도 새 순을 돋게 하는 거였다.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는 부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면, 자연은 인간의 노쇠한 육신마저도 어루만지고 꼼꼼히 쓰다듬어 회생(回生)의 신비로움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의사는 치료하고 자연은 회복시킨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자연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더없이 좋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의 품 안에 들어야 훨씬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연현상 하나하나도 자세히 살펴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이 세상 모든 생명을 위한 뜻 깊은 향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연을 받아들이고 향유(享有)할 줄 아는 슬기를 낳게 하고, 진정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성자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 씨를 뿌리고 싹을 심으면 대지는 그 넓고 자애로운 품으로 흔쾌히 보듬어, 몇 갑절의 풍성함으로 남김없이 되돌려준다. 뭉클뭉클 쏟아내듯 한없이 키워주는 자연의 넉넉함을 농촌 들판에 서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전부를 용납하는, 자연만이 갖는 대 긍정과 포용의 이치가 아닐까. 그 혜택은 정말 끝이 없다.

 이른 봄, 따뜻한 햇볕에 나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논밭 둑에 지천인 냉이와 달래 그리고 씀바귀를 캐고, 이어 고사리를 꺾고, 두릅을 딴다. 어디를 가나 새싹이요, 새순이다. 이 때 돋는 여린 잎은 독초마저 먹을 수 있다니 어린 것의 해맑고 순결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 무렵 산과 들은 취나물, 참나물, 다래순 등 셀 수 없이 많은 나물로 천지를 이루고, 봄 냄새 흐드러진 상큼한 밥상은 연일 녹색의 만찬이 된다. 더욱이 짧은 봄 밤, 숨 막힐 듯 비릿한 밤꽃 향기에 취해 평상위에 누워 바라보는 조각달은 애잔한 한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여름내 부지런을 떨며 건사한 텃밭엔 열무, 상추, 아욱 등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 보기만 해도 그 싱싱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또 밭 언저리에 재미삼아 심은 수박과 참외, 그리고 토마토는 볼품은 없어도 금방 따서 먹는 맛이 쏠쏠하다. 잘 익은 열무김치에 국수를 말아먹거나 구수한 아욱국을 배불리 먹고 바라보는 짙푸른 들판은 풍요함 그 자체다. 후텁지근한 여름밤은 깊어가고 시냇가에 깜박이는 반딧불은 내 상념의 한 자락을 끌고 한밤 내 온 하늘을 날아다닌다.
 가을의 풍광은 더욱 다채롭다. 들에는 누런 벼들이 출렁거리고, 오색으로 물든 산야의 찬란한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부지런히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과 함께 깨와 콩을 털고 고구마도 캐서 갈무리한다. 이어 찬바람에 코끝이 매울 무렵이면 흙 위로 흰 허리를 훤히 드러낸 무와 한 아름씩 되는 배추를 쑥쑥 뽑아 겨우내 먹을 반양식 김장을 담근다. 소슬히 부는 바람과 밤새도록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끝내 잡지 못해 떠나버린 그리운 사람과의 짠한 추억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이때쯤이다. 이 무렵 툭툭 떨어지는 알밤과 도토리, 그리고 은행 알을 줍는 일은 일상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토리를 줍는 일은 재미도 있으려니와 혀끝을 감도는 묵의 아릿한 풍미로 이내 입속에 침이 고이곤 한다.

 “도토리나무는 가을들판을 내려다보며 열매를 매단다더라.” 우두두 떨어지는 도토리를 주우며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희한하게도 도토리는 가을들판이 풍년으로 넉넉해지면 스스로 알아 덜 열리고, 가뭄이나 장마로 흉년이 될라치면 가지가 휠 정도로 많이 매달려 이 땅의 가엾고 힘든 백성의 고픈 배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물론 도토리나무가 매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무슨 수로 알겠냐마는, 이런 말이라도 서로 나누며 그악한 시절을 넘기고 스스로 위로 받고 살았을 우리 민족의 성정이 엿보이는 말이라 더없이 서글프다. 굶주려 묵 한사발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언제나 자연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배려하고 베푸는 존재로 믿으려했던 그 마음씨가 한없이 곱다. 아마도 평생 흙을 밟고 매만지며 살아온 우리 민족이 자연에게서 배운 소중한 지혜가 아닐지 새삼 그 뜻이 도탑기만 하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그 부드러움에 거칠었던 내면이 순화되고, 모든 것을 품었다 더 크게 내주는 경이로움에 흠뻑 빠질 수 있다. 인간은 늙어갈수록 흙을 사랑한다는 인디언의 속담이 있다. 무릇 고된 인생의 심연을 거치며 무르익은 사람만이 자연을 닮아가며 그것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닐는지.

 이 땅의 사람들은 자연의 품안에서 그것을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며 살았다. 비록 지치고 고된 삶일지라도 자연을 믿고 의지하며, 사소한 혜택마저도 특별한 은전(恩典)인양 감사하며 사는 민족이었다. 우리네 말에 ‘일의 성사는 하늘하시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자연과 함께하고 그 이치에 순응하며 살았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심지어 눈과 비도 오거나 내리는 게 아니라, 오시거나 내리시는 거였다. 위대한 자연 앞에 깊이 고개 숙일 줄 알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던 착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요즘 사람들은 잘되면 자기 덕이지만, 잘못되면 남을 탓하며 무턱대고 눈을 흘긴다. 서로 헐뜯고 책임을 떠넘기는 서글픈 현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도토리나무에 얼비치는 조상의 갸륵한 뜻을 되새겨본다.

 이제 이 가을이 지나면 한갓진 겨울이다. 농촌에서의 겨울은 휴식이다. 바삐 보낸 시간들의 번다함을 차분히 정리하고 찬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자신을 되짚어보는 침잠과 성찰의 시간이다. 아울러 또다시 찾아올 새봄을 준비하는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올 겨울에는 <남의 탓과 내 덕>이 아닌 <남의 덕과 내 탓>을 생각하면서, 흙을 닮아 푼더분한 이웃들을 청해, 들창 넘어 텅 빈 들을 바라보며 알싸한 도토리묵 무침에 막걸리나 거나히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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