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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는 피고 지고 또 피고    
글쓴이 : 조헌    12-11-17 00:30    조회 : 4,821
 
민들레는 피고 지고 또 피고
                                                                       조     헌

 칼바람이 사정없이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 저녁.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아프신 건 좀 괜찮아 지셨어요? 불편하신 점은 없구요?”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애써 태연한척 이것저것 삼촌께 말을 건넸다. “다 괜찮다. 염려할 것 없어. 아픈 것도 그냥저냥 견딜만하고, 자주 들락거려선지 사람들도 내게 모두 친절하더라.” 읽고 계시던 책을 덮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의연하신 삼촌의 태도에 나는 사실 꽤나 놀랐다. 간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 이미 몇 차례 입?퇴원을 거듭했고, 병원에서도 딱히 손쓸 방도를 찾지 못해 그저 통증만을 염려해야 했던 처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멀쩡하게 나를 맞으시는 삼촌의 모습이 도대체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엔 병세가 갑자기 심각해져서 구급차까지 불러 병원에 모시고 왔다고 하는 터라, 잔뜩 겁먹은 채 병실 문을 열었던 나는 일순 맥이 탁 풀렸다.
 긴 병에 간간이 통증이 가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두툼한 <고려사(高麗史)>까지 읽고 계시는 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치다 싶었다. 오늘내일 죽음을 목전에 둔 분이, 육 백 년도 훨씬 전인 고려시대가 대체 왜 궁금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다시 삼촌의 얼굴을 근심스레 바라보자, “그렇게 딱하게 쳐다볼 건 없다. 왔으니 가는 게 당연하지 뭘 그래! 그동안 그런대로 편안히 잘 살았어. 어려선 부모 잘 만나 남 못하는 유학도 했고, 운까지 따라 나라 벼슬도 할 만큼 했지. 덕분에 외국여행도 실컷 하고,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도 많이 먹으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면 된 거 아니냐? 다만 욕심이 크게 없어 돈은 많이 벌지 못했다만 그 때문에 남들에게 욕은 덜 먹지 않았겠니?” 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 나에게 침대 옆 의자를 권했다. “이제 통증은 덜 하신가 봐요?” “그놈도 이제 때가 다 됐다고 판단했는지 사정을 좀 봐주는 모양이야. 그동안 그렇게 못살게 볶아댔으니 미안도 할 테지 허허!”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은 모습으로 침대에 반쯤 기댄 채 빙긋 웃기까지 하셨다.
 병원 문을 나서며 도대체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가는 건지 헷갈려 헛웃음이 나왔다. 간혹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더니 죽음을 마치 이웃집에 잠시 다니러 가는 것처럼 무심히 받아드리는 삼촌의 모습에선 지난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하는 편안함마저 느껴져 진정 고개가 숙여졌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다. 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종교와 철학을 낳아 우리를 감싸고 위로해주지만, 결국 죽음이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고 말 것이라는 허무는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만들고 만다. 어쨌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평생 이룬 삶의 모습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삶의 끝에 이어진 죽음이 완전한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을 위해 크게 원을 그리며 순환하는 변화라고 생각할 순 없는 것일까. 생과 사를 그저 유유히 흐르며 계절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한줄기 강물로 볼 순 없는 것인지. 그래서 아득한 시간동안 변화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자연의 순리 속에 생명 있는 것들이 마침내 겪어야할 변화 중에 하나가 죽음이라고 홀가분하게 생각할 순 없는 것인지.
 
 아메리카 인디언 중에는 죽음을 남달리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죽음을 순환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변화로 인식해 거기에 대한 공포나 갈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임종을 앞 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이렇게 이른다고 한다. “사랑하는 <작은 나무>야! 내 이번 삶도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다음 생은 더욱 더 좋아질 거야. 이제 나는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얘야! 기다리고 있으마. 다시 만나자꾸나!” 그리고 조용히 눈을 들어 마을 뒤 깊은 숲을 쳐다보며 숲 속의 정령들에게 자신이 서서히 가고 있음을 노래로 나직이 읊조린다는 것이다.
 이토록 편안히 맞는 인디언의 죽음은 마치 법력 높은 불교 수행자의 입적(入寂)하는 모습과 너무 많이 닮아있다. 더욱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을 정령들에게 알리는 노래야말로 위대한 선사(禪師)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게송(偈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느 날 문득 "나 이제 그만 갈라네!" 한마디 말을 남기고 앉은 자리에서 홀연 열반에 드시는 큰스님들의 모습과 확실히 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자연스레 이생을 훌훌 털고 떠나는 모습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쪼개어 생각지 않은 결과는 아닐까.
 따지고 보면 삼라만상 모든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 이어져가는 것에 우리의 생사도 매달려 흐르는 것은 아닌지. 삶과 죽음, 그것에 욕망하고 처절히 저항하는 것은 한낱 범부들이 갖는 분별심의 소산일 뿐. 때가 되면 우리 모두 헌옷을 벗고 새 것으로 갈아입듯 표표히 이 몸을 벗어야 할 것 아닌가.

 삼촌은 내가 병원을 다녀 온 후, 삼일을 더 사셨다. 병원의 권유로 집으로 모신 다음, 하루 밤낮을 그 질긴 통증을 누르며 줄곧 눈을 감은 채 계시다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떠나셨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을 받고 곧바로 찾아가 뵈니 두 눈을 꼭 감은 삼촌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감이 감돌고 평화로움마저 느껴졌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긴 침묵. 그 적요감이 나의 머리를 시리도록 투명하게 만들었다. 이 때 문득 사흘 전 병실에서 보았던 <고려사>가 삼촌을 따라와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온기가 가신 삼촌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쥐어 보고는 가만히 책을 들고 삼촌의 서재로 갔다. 주인 떠난 그곳은 유난히 썰렁했다. 나는 그 책이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 제대로 꽂아 놓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책장 문을 닫았다. ‘딸깍’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은 아귀가 꼭 들어맞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모든 죽음은 산 자를 엄숙하게 만든다. 아마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내가 살아 온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 때문이리라. 지나온 삶의 모든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데 나는 어쩌자고 찧고 빻으며 번잡을 떨고 사납게 살았는지 삼촌의 미소 띤 영정을 보며 뉘우침과 아쉬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매운바람은 아직 남아있지만, 어디선가 겨울의 무게를 헤집고 더디게 봄은 찾아 올 것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한순간, 봄이 오면 쉬이 갈까 두렵고 꽃이 피면 곧 질까 걱정이다.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해마다 새로 돋는 나뭇잎처럼 봄은 수천만 년을 그렇게 속절없이 오고가고 있다.
 올해도 길섶엔 노란 민들레가 피고 지고 또 피고, 하얀 홀씨가 흩어져 사라지면 어김없이 이듬해 그 자리엔 다시 여린 싹이 돋나니 돌고 또 돌며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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