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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색 자책 한 방울    
글쓴이 : 홍정현운니동    23-05-31 16:53    조회 : 1,994

검은색 자책 한 방울


 

 

엄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들 제이가 옆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은 2022. 결혼 3년 만에 낳은 제이는 이제 스무 살이다. 중학교 때부터 이론물리학자가 되겠다던 아들은 스스로 유학을 결정했고 원하던 대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넌 언제로 가고 싶니? 친구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나는 제이가 어렸을 때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아기 제이. 작고 반짝이는 어린 시절 아들을 다시 만나 온전히 꼭 안아주고 싶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육아의 무게가 버거워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다. 다 그렇지 않은가? 차갑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순간은 깃털처럼 가볍게 사라져 다시 잡을 수 없는데, 그 순간에는 그것을 잘 모르지 않는가? 나도 그랬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좋은 엄마되기였다. 아이가 자라는 매 순간 나는 선택을 해야 했고, 내 선택이 혹여 잘못된 건 아닌가 불안해했다. 교사 생활을 하며 몸에 밴 엄격함 때문에 아들을 너무 엄하게 대한 건 아닌지, 나의 불안함으로 애를 더 다그친 건 아닌지, 후회가 된다.

소파 옆에서 웃고 있는 어린 아들을 본 순간, 이건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아기 제이와 같이 있을 수 있는 하루가 선물로 온 거다, 라고. 제이의 손을 잡았다. 작고 몰랑몰랑한 살결이 느껴졌다. 제이는 그림을 그렸다며 보여줬다.

제목은 노을이에요.”

흰 종이에 여러 색의 선들이 복잡하게 그어져 있었다. 제이는 그림을 그릴 때 윤곽 없이 색으로 표현했다. 그것도 꼼꼼하게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충 그어놓는 식으로. 초등학교 입학 후 원로 교사였던 담임이 제이 엄마, 제이가 색을 못 칠해. 어떻게 해?”라고 나무라던 일이 기억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나는 담임에게 죄송합니다.”를 자주 내뱉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내 안에 고인 불안은 출렁거리다 아이에게 흘러가곤 했을 거다. 그게 또 미안해졌다.

아들을 꼭 안으며 잘 그렸다고 아빠가 있는 서재 방 벽에 붙이라고 했다. 아들은 신이 나서 서재 방으로 들어갔다. 제이는 남편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둘은 환히 웃으며 벽에 그림을 붙였다. 창으로 한가득 빛이 쏟아졌다. 빛 속에서 우리 가족은 깔깔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와 빛과 웃음소리. 모든 것이 감사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제이가 잘 시간이었다. “이제 화장실에 가서 치카치카 하고 와.” 아이를 화장실로 보내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참 신기하지? 자각몽인데 정말 생생하다.” 남편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화장실에 가보니 제이는 칫솔을 입에 문 채, 선반 위 걸레가 들어 있는 바가지를 건드리고 있었다. 걸레가 변기로 떨어질 것 같았다.

제이야!”

나도 모르게 매섭게 소리를 질렀다. 아들은 흠칫 놀라서 하던 장난을 멈추고 경직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며 양치를 계속했다.

나는 기어코, 행운 같은 선물이라며 좋아하더니, 그냥 꿈일 뿐인데, 굳이 또, 화를 냈구나. 검은색 자책 한 방울이 조용히 내 안으로 떨어져 번져갔다.

 

이제 잘 시간이다. 끝날 시간이다. 꿈이 끝난다고 슬프지 않았다. 현실 속 제이가 있으니까. 아들은 미국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고, 이제 곧 방학이라 우리에게 돌아오니까. 꿈이지만 이렇게 어린 아들을 다시 만나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꿈속 어린 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아들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무언가의 실루엣이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라 바라보았다. 머리를 하나로 꽉 묶은 검은 옷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단호하고 사나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넌 자격이 없어!”

그렇게 말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여자는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는 팔로 제이의 가슴을 억세게 눌렀다. 어린 제이가 아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그 순간 비로소 알았다. 이 꿈은 악몽이었다.

 

 

 

수필미학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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