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오길순
“작은 누님, 큰형 집이 다 완성돼 가네요. 꼭 오셔서 식사 한 번 하시자고요.”
낙엽 지는 가을 날, 봄날 같은 소식에 마음이 들떴다.
“세상에 이런 일이네! 우리 막내, 얼마나 애썼어, 감사패를 줘야 할 것 같어.”
“아뇨, 누님! 재미도 있었어요. 빈 땅이 벽돌탑이 되더만요. 큰 형도 이제 허리끈 좀 풀어도 될 것 같아요.하하”
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던가. 평생 베풀기만 한 큰 아우에게 꿈같은 선물이 생겼다. 순전히 꽃 피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직장과 공사판을 뛰었을 막내아우 덕분이었다. 흙이 젖을까, 철근이 넘어질까, 구름 낀 하늘도 걱정이었을 막내가 그저 고마웠다. 덕분에 찬 서리 내린 이 가을, 육남매 열두 부부가 따뜻한 방에서 그리움을 풀어볼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화를 읽으면 가슴이 뿌듯했다, 안데르센의 <미운오리새끼>는 성장통을 잊게 했고, <성냥팔이 소녀>는 폐허에 핀 꽃처럼 눈물겨웠다. 이솝의 <갈 까마귀>는 올곧은 삶이 살아갈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중에도 잔불처럼 따스한 이야기가 있었다. <의좋은 형제>였다. 서로 벼 낟가리를 쌓아주는 착한 형제애가 가슴 뭉클했었다. 형제가 서로 놀라는 들판의 밤, 어디선가 밀레의 <만종>처럼 거룩한 종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다. 농촌도 산업화 되어 <의좋은 형제>는 이제 옛날이야기로나 남을 줄 알았다.
아버지는 늘 번족(繁族)이 소망이었다. 외동인 당신님의 외로움을 자식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셨을 터이다. 내리 세 아들을 두고도 늦게 막내아들을 얻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셨다. 축배를 들며 즐거워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여고 삼학년이던 내게는 좀 낯설었다.
그런 아버지의 속뜻이 전해진 것일까? 사형제 아우들은 정답기 그지없었다. 명절이나 제사가 오면 효성스런 자식인 양, 큰 형에게 달려왔다. 농사에 바쁜 큰 올케를 위해 제사거리를 사들고 미리 내려오는 작은 올케들도 자랑스러웠다. 미풍양속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지만, 하하호호 웃으며 음식을 장만하는 큰 아우네 부엌은 얼굴도 마음도 예쁜 올케들로 늘 정이 넘쳤다.
이십년 가깝도록 치매어머니를 봉양한 큰 아우 부부를 어이 잊으랴! 홀로 남으신 아버지까지 정성껏 모실 때는 사람들은 하늘이 낸 효자효부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어쩌다 친정 길에 나서면 동네 어른들이 큰 올케를 칭찬했다. 효도는 만행의 근본이라더니 이웃도 부모처럼 대하나 보았다. 때 없이 쌀과 고구마 참기름과 김장김치까지 보내는 큰 아우 부부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소시민에게 조촐한 건물은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데, 학창 때 베풀어준 형을 잊지 않았을까?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쳐도 되련만, 스치는 바람결인 양 눈감아도 되련만, 꼭 보은하리라 다짐했을까? 끝내 형을 헤아린 막내가 우러러졌다.
막내는 개발지역 네거리에 땅을 골랐다. 이름 있는 건축가에게 건축을 부탁했다. 만년거목을 키우듯 철근을 넣고 기초를 단단히 굳혔다. 근사한 돌까지 외장한 건물은 홍수가 와도 끄떡없을 성싶었다. 사람들은 근동의 명물이라며 구경을 오는 이도 있었다.
두루 망설이는 큰 아우에게 ‘형님, 허락만 하십시오. 부족한 것은 내가 다 댈 테니!’ 사정사정해서 시작한 건물이었다. 네거리 귀퉁이, 의좋은 형제탑인 양 우뚝 서 있는 사층 건물 앞에서 형제들은 하늘을 보듯 우러렀다.
세상에는 베풀기만 좋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 못주어 애타는 부모도 있고, 더 아쉬워서 부족한 자식도 있을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부모는 우애마저 어긋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씨앗의 수백 수천 배로 갚아낸 막내를 은혜 갚은 아우라고 이름 짓고 싶었다. 하늘은 사람을 통해 기적을 이룬다더니, 또 하나 <의좋은 형제>를 돌탑으로 세워놓은 것만 같다. 오성선, 그대는 작은 거인!
『한국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