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임 정원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여인이 있다.
지금은 성인이 된 연년생 남매가 유치원에 다니던 1983년, 현충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십대 후반이었던 나는 아이들에게 “현충일에 대한 의미와 나라를 지킨 분들의 숭고한 뜻”을 알려줄 나이가 되었다 싶어 아이들이 잘 따르는 초등생언니 둘과 함께 지금은 ‘국립 서울 현충원’이 된 ‘국립묘지’를 견학하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김밥과 과일을 배낭에 담고 전날 사서 물에 담가놓은 흰 국화 다섯송이와 돗자리를 챙겨 집을 나섰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동작동 국립묘지,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현충탑 제단의 헌시가 찡하게 가슴에 다가왔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 따라 아이들이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올라갔다, “내일 모레가 현충일인데 참 조용하고 적막하네”하며 묵직한 배낭을 고쳐 메고 뒤따르는데 유월의 바람이 살랑거리며 우리를 반겼다.
한 줄 흐트러짐 없이 서있는 사병묘역에 들어서자 누가 시킬 것도 없이 아이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애들아, 이리와 ! 자, 꽃 한 송이씩 묘비 앞에 드리고 우리 묵념하자, 우리가 편히 놀고 공부하고 잠잘 수 있게 우리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이야,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단다.””네.“ 합창하듯 대답하는 아이들을 묘비 앞에 둘러앉히고 아직 어려서 이해하기 어렵다싶기도 한 이곳의 역사를 나름 쉽게 애기해주려고 말문을 열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우리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게 되었지. 그 후 우리 정부가 수립되자 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 국군이 발족되었어, 처음에는 북한군의 도발로 전사한 군인아저씨들을 서울과 부산의 어느 절에 모셨는데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전사자 수가 너무 많아져서 1955년 이곳에 ‘국군묘지’를 만들었단다, 그러다 10년 후인 1965년에 ‘국립묘지’로 이름을 바꾸고 군인아저씨들만 오던 이곳에 애국지사, 경찰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나라발전에 이바지한 분들까지 이곳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단다.”
아이들은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체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여섯 살 유진이 묘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 ! 그 군인 아저씨들이 여기 땅속에 누워 있는 거야?”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걸 보며 나도 들킬세라 고개를 젖히고 먼 곳을 바라보니 귀퉁이 어느 묘비 앞에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보내고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생각하며 뜨거워지는 햇살을 뒤로하고 묘역을 벗어나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에 서있는 큰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가져온 음식을 꺼냈다. 네 명의 아이들은 조금 전의 숙연함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준비해간 김밥과 과일을 맛있게 먹으며 콧노래를 부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
그때 “저어...” 모시한복을 곱게 입은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 아까 보았던 그 여인이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아이들도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에게 “천천히 먹고 있어”하고 무슨 일일까 싶어 일어났다.
”저, 정말 미안한데요 이런 애기해도 괜찮을지...“ ”네? 말씀하세요,,, “ ”제가 과일이 좀 있는데 드리고 싶어서요...“ 여인의 손에 사과며 배, 포도송이가 가득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과일 있는데...“
순간 머릿속에 여러 복잡한 생각이 교차되었다, “뭐야, 아이들이 넷이나 딸린 궁색한 젊은 새댁으로 보였나?” 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남이 주는 건 절대 받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더구나 먹는 음식을...기독교 믿는 사람들은 제를 지낸 음식은 받지도 먹지도 않는다던데...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정중히 거절 해야겠어,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좀 전의 다짐은 사라지고 과일봉지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과 미소, 그녀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거절하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내 마음도 편치 않을 거 같아서였다. “네, 주세요...” 나는 두 손을 내밀어 ”고맙습니다.“하고 과일봉지를 받았다.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마워요“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그녀를 향해 아이들도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쓸쓸히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행복하게 잘 사세요...라고
다시 더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 길, 아까는 상황을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까지 한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까 왜 모르는 할머니한테서 과일 받았어요?” “응, 어른이 되면 그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될 때가 있어.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혼자일 때 남이 주는 거 절대로 받으면 안돼 ! 알았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젤 소중한 게 믿음인데... 메말라가는 사회를 탓하며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의 모습이다.
“호르르 호르르....” 묘역 근처 숲속에서 산솔새가 울었다,
“호르르 호르르....” 아이들이 따라 부르며 뛰어 내려갔다.
삼십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6월이 오면 그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