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지순례기
김경숙
시간은 지금에 멈춰 있다. 오늘이 며칠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두 달 전에 프리랜서로 일하던 사무실을 그만두었는데 지금도 퇴사한 다음 날 같다.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뒤, 몸살감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자매들과 미리 계획해 두었던 여행을 또 떠났다. 여행 내내 감기를 달고 다녔다.
요 며칠, 성지순례기를 정리하느라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지낸다. 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이제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늦게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몸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다 화장실 한두 번 들락거리고 나면 어느새 창밖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현재의 시간과 이곳의 공간이 잠시 사라진 듯하다. 특별했던 순례의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잠시 일상을 접어두고, 이제 인도 성지순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힘든 시절을 겪는다. 한때 나도 괴로움을 누군가 해결해 주길 바라며 교회, 성당, 사찰 등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그러면서 종교마다 섬기는 신, 건축양식, 의례와 예불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9년 전 일상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사무실 근처에서 생활 명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명상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무신론자였다. 우연한 기회에 무념 스님과의 인연을 계기로 불교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라는 연기법이 이론이 아닌 실제로 와닿았다. 모든 존재가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도 고정된 실체의 무엇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존재임을 인지하며 무상·무아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앎은 나라는 존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흥미를 갖게 했다.
나는 어릴 적 청주에서 살았다. 엄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신 살아생전에는 어떤 종교도 갖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나름대로 어떤 기준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마당에서 목탁 소리가 들릴 때면 엄마는 스님 등에 멘 자루에 얼른 쌀을 퍼서 부어드리곤 했다. 그렇게 내가 본 스님의 첫 모습은 탁발승이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스님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탁발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TV 드라마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 산속에 기거하며 도를 깨우치는 분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분들이 계시는 절도 단순히 소원을 빌기 위한 기복신앙의 장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말이다.
무념 스님께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초기 불교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상좌부와 대승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부처님 열반 후 율(律)법에 대한 추가 사항이 거론되면서 부파불교로 나뉘고, 이후 경전해석의 보완적 의미를 강조한 대승불교로 이어진 시대적 변천사도 이해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국의 종교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482개의 불교 종파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중에서 스님과 신도, 소속 사찰의 수가 파악된 종파는 146개이며, 나머지 336개는 상세한 정보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게 부처님의 법에서 비롯된 불교가 어떻게 다양한 종파로 나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뿌리에 깃든 부처님의 생애가 더욱 궁금해졌다.
종교적 관점을 떠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정된 관습은 종종 발전을 지연시키거나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불교 또한 예외는 아니다. 탁발을 비롯한 여러 예법과 규칙들 역시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근대 상업이 발달하면서 불교에서 전해지던 탁발의 방식도 변했다. 어릴 적 보았던 스님의 쌀자루를 지금은 볼 수 없다. 탁발 형식이 점차 음식에서 돈, 토지, 노동과 물건 등으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입멸 후 약 100년경, 계율 문제로 교단 내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대립했다. 그로 인해 부파불교로 분열되었으며, 당시 주요 안건 중 하나는 탁발의 한계성 문제였다고 한다.
나는 여러 명상 프로그램을 체험하면서, 동서양의 명상 전통 중 상당 부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불교에 관심이 깊어지면서 관련 유튜브를 자주 듣게 되었다. 그러다 2년 전 어느 날,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보조 지눌스님의 수심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당시 특정할 순 없지만, 어느 한 대목에서 멍해졌고 그 순간 깊고 고요한 공(空)으로 쑥 빠져들어 갔다. 그러고는 어떤 번쩍하는 침묵의 울림이 크게 와닿았다. 나도 모르게 불량한 자세를 바로잡으며 ‘아하! 그렇구나. 만물이 허공 속에 흩어지는 꽃잎이구나.’라는 앎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러네! 모든 것이 허공에 떨어지는 꽃잎이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깨우침이 밀려오면서, 순간적으로 앎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되뇌며 그 경험의 놀라움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나(我相)를 알고 있는 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모든 존재가 오온으로 덩어리진 허공 꽃에 불과했다. 이 세상과 우주 진리가 텅 빔으로 알아졌다. 아상인 나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무엇이 따로 있었다. 이 앎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단순해졌다. 이어 명상하던 중에 부처님과 내 존재가 하나 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안정과 평화로움을 느꼈다.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비록 아직 불교의 초보자이지만, 허공 꽃을 본 이후로 이런 경험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렇게 부처님을 접하며 점차 마음으로 친숙해졌다. 이를 계기로 부처님과 불교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어졌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침, 무념 스님께서 인도 성지순례를 계획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이러한 텔레파시가 여기서 인연법으로 접목된 듯하다. 평소 자주 뵙던 무념 스님과 함께하는 인도 순례에 동행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이었다. 내면 깊숙이에서는 이제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스트레스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퇴사를 고민하게 되었다.
다만, 스님이 계획하신 출발 날짜와 내 일정이 어긋나 있었다. 부처님에 대한 잠재된 갈망의 씨앗이 발화되었는지 날짜 조정이 가능해졌다. 마침내 부처님을 만나려는 염원이 실감 나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시절 인연이구나.’ 이제 더는 직장으로 인한 시간 부족을 핑계 삼을 수 없다. 무념 스님과 함께하는 이번 순례에서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여정이 나 자신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 내가 품은 목적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진정 네 것이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기 위해서다. 성지순례를 준비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부처님의 흔적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고 있다. 순례를 앞두고,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 근교의 사찰을 찾아 마음을 정리했다.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내면의 변화를 위한 수행이다. 부처님의 자취를 따라감으로써 내 안에 잠재된 긍정의 에너지를 깨우고 그 흔적과 하나 되는 여정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 긍정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은 세상의 정보와 편견에 의해 그 긍정이 가려져 있다. 부처님의 흔적을 찾아 하나가 된다면, 그 흔적을 찾은 만큼 업이 지워지고 선업(긍정)이 쌓인다고 나는 믿고 있다. 부처님의 흔적을 얼마만큼 나에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내가 평소에 닦아온 역량에 달려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아직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정성을 다하자. 나는 관광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부처님은 무엇을 남기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