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 나를 기죽게 하는 것들    
글쓴이 : 이하재    23-04-22 15:15    조회 : 1,857
*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

나를 기죽게 하는 것들

 어느 분야든지 성공을 위해서는 관계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왕성한 활동을 위해서는 기가 충만해야 한다. 기가 살아있지 않으면 어떠한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운동선수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도 기를 살리려는 한 방편일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기가 센 놈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은 자명한 일이요 기가 약한 놈은 성공의 그늘에 가려 그냥저냥 살아가기에 십상이다.
 기는 활동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힘이다. 기가 죽으면 점점 소심해지고 움츠려져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게 되며 활동할 의욕마저 사라지게 한다. 성공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기는 왜 죽는 걸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대부분이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기고만장하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어깨에 힘이 빠지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은 친구들과 비교하여 돈도, 빽도, 힘도, 능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 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신나는 일이 생기면 기가 살아나 세상을 가진 듯 얼굴에 화색이 돌고 의기양양하게 되지만, 재능도 배경도 없는 놈이 잘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신명 나는 일을 만나기가 쉬운가. 사소한 일에도 기가 죽어 의기소침한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게 안타깝고 서글프다.

 옆자리에 탄 젊은 손님의 절구통 같은 허벅지를 보면 나는 기가 죽는다. 만져보지 않아도 단단하고 재보지 않아도 내 다리의 세 배는 됨직한 우람한 다리를 힐끗힐끗 쳐다보면 내가 초라해진다. 의자에 납작 붙어있는 얇은 내 허벅지와 마곡사 대광보전 안에서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굵은 손님의 허벅지를 비교하면 내 마음마저 짓눌려 쪼그라진다.
 말 잘하는 손님을 만나면 나는 기가 죽는다. 나는 과묵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말 수가 줄어들어 거의 대화 없이 지내곤 했었다. 대화해도 단답식으로 내 의견을 피력하기를 주저하였고 소극적이었다. 가족과도 이심전심으로 소통하였을 뿐 살가운 표현으로 정이 넘치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습관은 말을 더듬게 하고 대화를 꺼리게 하였다. 손님과 작은 다툼이라도 생기면 나는 바로 꼬리를 내린다.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남자 앞에서 나는 기가 죽는다. 키가 크거나 얼굴이 잘생겼으면 인물평가에서 많은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람의 속을 알기까지는 겉모습으로 호불호를 가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아주 작거나 아주 못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키가 작고 키보다 얼굴이 큰 편이고 큰 얼굴에 비해 이목구비가 작은 편이다. 얼굴 생김새로 별명을 들었던 나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의 ‘달님’은 귀여운 면도 있는데 중학교 시절의 ‘넙죽이’와 ‘누름적(빈대떡)’은 듣기 싫었다.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딱 한 마디는 정말 싫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를 부르니까 작은 눈이 더 작게 보였나 보다. 뱁새 눈 같다는 말이 50년 세월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는다.
 작년에 10억을 주고 산 아파트가 20억이 넘었다는 손님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나는 기가 죽는다. 저희끼리 얘기하면 먼 나라 이야기로 듣고 흘릴 텐데 가끔은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다. “동탄에 삽니다.” “동탄 신도시인데 많이 올랐죠.” “많이 올랐겠죠.” 나는 모른다. 남들 다 아는 아파트값을, 얼마나 올랐는지 모른다. 대답이 시시껄렁해 대화는 계속되지 않는다. 주택은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거주의 개념으로만 인식하고 살아온 어리바리한 나는 억, 억 소리에 우울해진다.
 문학지에 소개한 작가들의 학력을 보면 나는 기가 죽는다. 대학교 졸업, 대학원 수료, 박사 등 높은 학력, 유명한 학교 출신이면 곧 그의 실력을 말해주는 듯해 부럽다. 나는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학력의 차이는 신분의 등급으로 귀결되곤 하였다. 학력과 무관한 택시 운전을 하며 살고 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늙어서 독학 학위제로 국문학사가 되고 사이버대학교를 졸업했다. 똑같은 학력으로 인정은 한다지만 대놓고 내세울 처지도 아니다. 이러저러한 박사님들이 한없이 우러러 보인다.
 신인 작가들의 찬란한 경력을 읽으면 나는 기가 죽는다. 어느 유명회사의 이사, 상무, 전무, 사장, 회장 등 굵직한 직함이나 두루 거친 화려한 이력을 보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교직이나 교원, 교장을 몇십 년 봉직 후 정년 퇴임했다거나 무슨 대학교 교수나 총장 등의 경력을 나열해 놓은 것을 보면 존경심과 부러운 마음이 든다. 나의 경력은 너무 단순하고 보잘것없다. 나는 택시 기사다.
 유명 시인과 작가들의 수상 경력을 보면 나는 기가 죽는다. 문학세계에도 상이 많다는 것을 몰랐었다. 상이라면 학교에 다닐 때 우등상과 개근상, 또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 받는 것인 줄로만 알았었다. 상은 학생들이 받고 어른들은 주는 거로 생각했었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교수님들도 많이 받는다. 상에 따라 상금도 몇천만 원에서 몇십만 원까지 다양하다. 상을 많이 받아 몇 개만 적고 나머지는 ~ 등으로 적는 작가들이 하늘에 계신 그분처럼 존경스럽다. 나도 상을 받았다. 신인상도 상인데 자랑하기 초라하고 쑥스럽다.
 어쩌다가 숨이 멎을 듯한 감동적인 멋진 시를 읽으면 나는 기가 죽는다. 시인들은 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날까지 본인의 시가 전해져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나도 그런 꿈이 있다. 그러나 꿈일 뿐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 밤낮없이 시와 씨름을 하여도 시 한 편 건지기 힘든데 밥벌이를 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처지다. 시와 무관한 택시 운전을 하면서 시의 싹이 솟아오르기를 마냥 기다리는 게으른 시인이다.

 나를 기죽이는 것들은 모두 내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자존감을 되찾아 기죽지 말아야겠다. 비록 가진 것 적고 뛰어나게 잘하는 어떤 것도 없으나 그게 무슨 대수이고 무슨 상관인가. 나는 나의 길을 내 보폭에 맞추어 묵묵히 갈 뿐이다. 나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