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과 예순

고 둘 선

 "언니, 뭐해요? 지금 가도 되죠?"

 친한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동생 J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사근사근하면서도 곰살맞은 성격만큼 "언니, 오늘은 기분이 어때? 어제는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 보였어. 그래서 좀 만들어봤는데 언니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하면서 반찬을 해오거나 간식거리를 사들고 온다. 커피는 기본이다. J는 친정 여동생과 동갑에 나 또한 J의 큰언니와 동갑이라 서로가 예사롭지 않은 인연의 만남이었다. 그래서일까. J동생과는 사흘이 멀다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로 수다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며칠 전 J와 동네 산책로로 나가는데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젊은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얘, 너 정말 예쁘구나. 나중에 커서 미스코리아 하면 되겠어!" 하니 아이 엄마가 약간의 어눌한 말투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짙은 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 오뚝하게 솟은 콧날, 쌍꺼풀이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의 엄마는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시집을 온 듯했다. 두 모녀 모두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면서도 맑고 초롱초롱힌 아이의 눈매는 영락없이 엄마를 꼭 빼닮았다.

 "너, 몇 살이야?"

 "아홉 살 이예요."

 '아홉 살? 아홉 살치고는 너무 작은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처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너, 다섯 살이잖아. 내년이면 여섯 살  되는 거야." 하니 아이는 "아냐 엄마, 나 지금 아홉 살로 가는 중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지만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아홉 살로 가는 중이라.' 그렇다면 나는 몇 살로 가는 중일까. 예순 살? 일흔 살? 백 살? 현재 그 아이는 아홉 살이 인생 최대의, 목표의 나이로 정해놓고 가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주변에 아홉 살로 멋져 보이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아마도 아이는 아홉 살로 가기 위해 그 나이 또래에 할 수 있는 몸의 키와 마음의 키가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4년 후면 내 인생의 나이테도 예순이다. 나는 내가 예순으로 가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도, 당연히 애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건설 현장 노동자인 남편의 적은 수입에 의존해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쁘다는 핑계 뒤에 숨어 '이만하면 오늘 하루도 잘 살아왔구나.' 자위하며 합리화를 시켜왔다. 예순이 되면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겉으로 보이는 삶의 여유를 줄 수 있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관절 여기저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깰 만큼 건강이 좋은 편도 아니다. 그래도 거부할 수 없는 나이 예순은 다가온다.

 일흔, 여든보다 앞서오는 나이 예순. 예순하면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한다. 과연 그  말이 모두에게 적용되기는 할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50년대, 60년대 궁핍과 혁명, 잘살아보세,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딸들은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살림 밑천이 되어야 했고,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으로, 남의 집 식모살이로, 버스 안내양으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 딸들이 부엌에서 뛰쳐나와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예순을 조금 넘어섰거나 예순을 바라본다.

 아이는 4년 후 아홉 살로 가는 중이고 나는 예순으로 가는 중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지금의 현실보다 조금은 나은 그러면서도 나를 찾아가는, 내 목소리를 또렷하게 낼 수 있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새들의 지저귐에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자연과 더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가 한 편의 수채화를 그려가듯 내 남은 생의 여백의 미를 채워갈 수 있는 평탄한 길을 걷기를. 고개 숙인 벼 이삭 너머로 불어오는 시원한 들녘 가을바람에 나의 작은 소망 한 자락을 실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