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시절의 졸업식을 아십니까?
장 석 률
지금은 졸업식이 의례적인 행사정도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60세 전후의 세대는 졸업식이 인생의 기로를 결정하는 아주 큰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
공부 좀 하고 집안형편이 나은 학생은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학업의 길의 접고 취업의 길로 나아가야 했으니 졸업식장이 눈물바다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취업이라고 해봐야 공돌이 공순이로 나가야 했고 월급은 쥐꼬리만 했으니 고단한 인생길이 열리는 순간이 졸업식입니다.
제가 충남 서산시 **면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중학교는 남녀학생 합하여 100명 남짓이고 대부분 농사를 짓는 가난한 소농의 아들딸들이었습니다. 높은 산도 없고 넓은 강이나 평야도 없습니다. 야트막한 산에 기대어 골마다 다랭이 논과 밭이 유일한 밥줄이었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학교 운동장에 버스 두 대가 운동장으로 들어서 졸업생중 여학생만을 태우고 떠나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 버스는 다름 아닌 **방적 회사의 버스였는데요 아이들을 **방적회사에 취직을 시키고 야간 고등학교를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단체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는 교장선생님이 여자분 이었는데 그 교장선생님이 졸업식을 끝내고 교장실에서 혼자 입술을 깨물며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마치 당신이 아이들을 진학시키지 못하고 공장으로 보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여학생뿐만 아니라 남학생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서울 친척이 소개해주는 공장, 철공소, 정미소, 술집 종업원, 버스 정비공장으로 뿔뿔히 흩어졌고,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친구는 자동차 학원이나 중장비 학원, 안경학원 등으로 갔습니다.
시골학교 동창회가 유난히 정겹고 잘 모이는 이유가 달리 있을 리 없습니다. 그 시절이 얼마나 한스러웠으고 친구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끼니 거르지 않고 밥술이나 뜨며 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그리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은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대부분 대학교 졸업은 기본인 시절이 되었으니 아이들한테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일 뿐입니다.
보릿고개를 겨우 넘어선 1970년대 가난했던 시절의 졸업식이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 자녀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