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누구나참여광장 >  수필공모



  첫 인상은 만화 주인공    
글쓴이 : 윤광일    20-01-14 07:59    조회 : 5,743

첫인상은 만화주인공

어릴 적 나는 대학이라는 데가 흑백 시대에서 다채색(多彩色)의 세상으로 뜀박질을 하는 경계선인 줄 알았었다. 그랬던 탓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고, 한동안은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색다른 세상에 흠뻑 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몇 달도 안 되어 또 다른 무채색의 세계로 빠져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내 의지대로 판단대로 새로움을 바라보며 사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학교와 술집, 그리고 진짜 집으로 이어지는 쳇바퀴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지개를 좇아 비겁하게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나는 이를 벗어나고자 학습 동아리문을 두드렸다. 한동안 외면했던 공부를 다시 하고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가을에 나무가 낙엽을 떨구어 내듯 대학 생활에서의 기대와 환상을 서서히 지워갔다.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려는 12월 초, 동아리 문 앞에 신입회원 모집이라는 공고가 붙었다. 1학년이 나 혼자였던 상황인지라 동아리 선배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신입회원을 뽑기로 했다. 얼마 후 여학생 한 명이 동아리에 가입 신청을 했고 눈이 부슬부슬 내리어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던 날 신입회원 환영식이 열리게 되었다. 나는 동기가 한 명 생겼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풍성한 안주로 한 잔 술을 기울일 수 있어서 더욱더 좋았는데, 그나마 취해서 세상을 바라보면 간혹 무지개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듯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날이 어둑해지고 신입회원을 환영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선배들과 같이 동아리방을 나와 1층 로비로 내려가서 단과대 현관문으로 향했다. 때마침 어느 여학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칭칭 감은 목도리로 반쯤 파묻혔고, 그나마 나온 부분은 커다란 안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머리에 푹 눌러쓴 털모자 가장자리에는 뽀글뽀글한 머리털이 장식처럼 둘러싸고 있어 어디까지가 모자이고 머리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두꺼운 파카는 항아리 모양으로 그녀의 상반신을 퉁퉁하게 둘러 감싸 안아 얼핏 보면 남자로 착각할 만도 했고 푸른 청바지는 젓가락처럼 파카 아래로 기다랗게 튀어나온 듯 보였다. 조그만 발에 씌운 신발은 성냥의 빨간 머리 마냥 동글동글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차림을 한 그녀의 첫인상은 현관문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학교 전경을 배경으로 삼아 툭 튀어나온 명랑만화 주인공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선배가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나에게 새로운 신입회원이라며 소개를 시켜 주었고 내 입꼬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좌우로 한껏 올라갔다. 인사를 하니 귀여운 목소리가 답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만화 주인공의 목소리라고 해도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만화와 같은 삶이 존재할까?’

잠시였지만, 내 삶을 신선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피어올랐고, 그래서인지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는 교정을 걸어가는 그녀를 흘깃흘깃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조금씩 감기는 것이 보였다.

피곤한가 보네? 힘든 일이 있었나 봐?”

깜빡이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만화 같은 얼굴이 더욱 만화처럼 변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제 우리 과 남자 동기 두 명을 술로 보내버렸어. 술도 못하는 애들이 기분 나쁘게 굴어서.”

그러고는 늦게까지 과음을 하여 약간 피곤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남자를 술로 보냈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선뜻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차 확인하니 그녀는 어젯밤 남자들하고 술 대결을 해서 이겼다고 말하며, 술을 마시다가 간혹 여자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들으면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마음은 불편해졌다. 사실 이는 남자보다 술을 센 여자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틀에 박힌 생각 때문이었고, 융통성 없이 굳어진 듯 보이는 현실의 틀을 깨고 싶어 했던 내 가치관과도 동떨어진 감정이었다.

그래? 술을 잘 마시는 모양이지? , 동기끼리 한잔해볼까!”

처음 본 그녀에게 무심결에 결전을 요청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신입회원 환영회가 술 싸움터로 변할 조짐이 보였다. 선배라면 이를 말려야 했지만, 보기 드문 광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오히려 우리를 부추겼다.

나와 그녀는 선배들의 묵인하에 술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소주잔에 각자 술을 따라서 동시에 마시자는 간단한 룰도 정했다. 한 잔, 두 잔, 석 잔, 소주를 넘기다 보니 목이 씁쓸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앞에 있는 동태찌개 국물을 한술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반칙하지 마! 안주를 먹는 술 대결이 어디에 있니!” 확실히 그녀는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단칼 자르듯 몰인정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았고 이는 나의 자존심에 확실한 자국을 냈다.

다시 한 잔, 두 잔, 석 잔, 그리고 열 잔이 넘어가고부터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이 사건은 동아리에서 술 좀 한다는 선배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으나 몇 주도 안 되어 모두 사그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소주 3병을 넘게 마셔도 처음과 별다른 바 없이 꼿꼿할 정도의 체력이 있었고 술에 강한 체질을 타고 났다. 이런 사람을 누가 술로 이길 수 있겠나? 처음부터 잘못된 대결이었다.

실제 그녀는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했다. 만화 주인공과도 같은 외모에 걸맞게 사람들의 말에 따라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와 같이 이야기를 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기쁘면 박장대소를 하고 슬프면 얼굴 한가득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궁금증이 일면 얼굴 전체에 호기심이 번지고 눈에는 알고 싶다는 욕망이 번뜩였다. 계속해서 복잡한 상황 설명이 오가면 얼굴 가득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해지면서 입에서는 툴툴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술자리에는 빠질 수 없는 귀인이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봄. 나에게도 햇살이란 녀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만 없을 듯싶었던 여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사고와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동생만 있고,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는 이과를 선택한 사내의 한계였다.

만남이 계속되면서 머리는 복잡해지고 생활이 엉클어졌다. 여자를 잘 아는 친구가 없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민을 말하니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열심히 들어주었다. 특별히 무엇을 하라고는 안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그건 아닌 듯한데.’라는 말로 조언을 해주었다. 그렇게 여자와 사귈 때 아닌 게 무엇인지를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밑도 끝도 없이 자기의 인생철학이나 근거 없이 여자 사귀는 방법을 설파하는 남자 동기나 선배의 말보다 신뢰가 가는 그녀의 조언에 빠져들었고, 어느 사이엔가 고민거리가 있으면 그녀와 상담 아닌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상담료는 소주와 간단한 안주. 술은 각자 따라 마시기였고 서로 따라주다가 내가 취하면 안녕하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 역시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이점이 나의 마음을 더욱 편하게 해주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나의 부담 없는 술친구가 되어갔다. 한 일 년쯤 후에 그토록 고민하면서 만남을 이어가고자 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고, 나는 군대에 가기로 하였다. 스산한 겨울이 깊어가는 12. 동아리 사람들과 만나 술을 기울일 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얼마 안 있으면 제복을 입을 술친구의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지금도 그녀는 옆에서 내 말을 들어주기도 하고 투덜대기도 한다. 그러고는 간간이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내가 먼저 입을 연다. “술만 아니었다면.” 나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답한다. “그러게 술만 아니었어도.” 


노정애   20-01-15 09:23
    
윤광일님
재미있는 글입니다.
잘 쓰셨어요.
몇가지만...
'했었다'---. 했다
이렇게 바꾸는게 좋습니다.
시작 부분인 '어릴 적 나는' 이 부분을 빼 보세요.
글이 좀더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퇴고시 소리내어 읽어보세요. 조금 걸리는 문장들을 잡아내기 딱 좋은 방법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을 기다립니다.
윤광일   20-01-15 09:41
    
리뷰 감사합니다.
 
   

윤광일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5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수필 응모하는 분들은 꼭 읽어보세요 (6) 웹지기 05-15 74178
5 슬레이트 지붕 (2) 윤광일 02-13 4366
4 은행동 (2) 윤광일 01-30 4022
3 동물의 왕국은 사기다. (2) 윤광일 01-16 4610
2 첫 인상은 만화 주인공 (2) 윤광일 01-14 5744
1 삼시 세끼 (2) 윤광일 01-13 5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