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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빛 비둘기    
글쓴이 : 봉혜선    24-09-09 15:57    조회 : 4,256

잿빛 비둘기

 

봉혜선

 

 유유자적 차도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날기를 포기한 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건물 때문이었으리라. 낮고 짧게 뛰듯 걸으며 먹이를 구하는 비둘기의 색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과 비슷하다. 회색 시대에 살 줄 알았을 비둘기 종족의 예지력에 감탄한다.

 번잡한 시간이 아닌 때이고 바쁜 일을 끝내고 신호등을 따라 길을 건너고 있었다. 버릇이 된 빠른 걸음을 치고 들어온 비둘기를 좇아 따르던 눈에서 차도로 들어간 비둘기가 사라졌다. 아스팔트 바닥과 비슷한 색인 비둘기가 바닥과 한 몸인 듯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환경에 순응하는 동물에 대해 언제나 놀라곤 한다. 몸 색깔을 바꾸는 능력이 탁월한 카멜레온도 아니고 정글에 사는 호랑이나 사막의 낙타처럼 환경에 특화된 색도 아닌 비둘기의 도시 색은 언제부터 어떻게 미리 알게 되어 준비되고 있었을까.

 비둘기 부리는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의 성근 틈 사이 과자 부스러기를 쪼기에 좋은 기울기와 굵기와 길이를 가졌다. 육화되어 있는 그대로 유전되어 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포도鋪道 위 흘린 음식물을 처리하며 사람들과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다. 건물 사이를 날렵하게 빠져나가는 제비와는 차별을 가지려는 순응력을 가진 날짐승.

 우리의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해서인지 누구도 비둘기를 해하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감히 평화를 해치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곳곳에 거처를 마련해주는 둥 도시는 그들에게 아부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시 속 여유 있는 걸음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저 행보는 비둘기의 물불 못 가리는 작태가 아니라 평화의 몸짓이며 평화로 향하는 걸음인가.

 비둘기들은 화장실을 구별하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종족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는 것일까. 도심 한복판 백화점 앞 분수 옆을 배설물로 하얗게 변색시켜 놓았다. 비둘기 모이를 팔거나 혹은 다이어트를 위해서인지 먹이를 주지 말라는 공원의 경고문도 예사다. 자연 습성을 버리고 도시에 적응한 비둘기는 삭막한 도시의 거리와 사이가 좋다.

 사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는다거나 차도를 걷는 흔한 모습이 이제는 눈에 익다. 반려견과 다니는 사람에게 눈총을 건네지 못하고 둘을 피해 걸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처럼 비둘기를 피해 걸어야 할 정도이다. 반려동물을 비켜서 줄 줄 모르는 눈치 없는 주인처럼 뒷짐을 진 자세로 비둘기는 당당하다.

 바닥의 대부분을 차지한 잿빛을 띠고 있으며 눈을 들어도 회색 건물뿐인 도시의 색을 닮은 비둘기에게 칼라풀한 옷을 걸친 사람은 이다. ‘어어하며 차 밑으로 휩쓸릴 비둘기를 걱정하느라 때로 운전이 흔들리므로 차도 비둘기에겐 약자다. 흐릿해지며 지워져가는 흰색의 실선과 점선, 노란 중앙선 위에 발을 놓으며 몸을 옮기는 비둘기가 차를 조종한다. 신호등처럼 깜박이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차와 사람들. 도시에 섞여 과감히 자신의 정체성을 바꾼 새. 온통 희거나 혹은 잿빛 일변도의 비둘기가 드문 것으로 보면 적당히 섞여 사는 지혜조차 갖춘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지 않은가.

 나는 돌아본다. 비둘기 종족만한 예지력도 없이 사람 모양만으로 사람 사이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어울리는 색을 갖추지 못한 채, 연출해 낼 능력이 없는 채 튀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며 왜 나를 차별하느냐고 불평해오지 않았던가. 주변에 나를 맞추려는 노력 따위는 헌신짝 보듯 하며 나의 색을 주장하거나 알아주지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나라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말만을 주술처럼 웅얼거리며 못 알아준다고 답답해하지 않았는가. 빨간 신호등을 켜놓고 사람을 기다렸고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불행해 하지 않았던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평화롭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이제는 잿빛의 나이가 되었다잿빛은 순응의 색이다사라져간 비둘기는 버스 아래에서 더 아래로 몸을 낮춰 도로에 그은 선인 듯 기다렸다가 예의 발걸음으로 사람이 걷는 데로 태연히 가볍게 풀썩 날 듯 걸어 올라올 것이다. 공중을 포기하고 사람 사는 낮은 데로 내려온, 어쩌면 새이기도 포기한 저 종족들의 색감에 취해 한없이 바라본 날이다. 카멜레온을 부러워한 적이 있는 젊은 날의 갑갑함이 사그라져 간다. 나이에 맞게 살아볼, 제 색에 맞게 지내볼 수 있기를 염원하느라 신호등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잿빛을 따라다녔다.

수필이란? 투명함을 그리며 세상 들여다보기, 관계 맺기.


<<수필 오디세이, 202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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