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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촉한 선물    
글쓴이 : 배재욱    21-07-21 17:24    조회 : 4,418

촉촉한 선물

 

배재욱

 

만년필 펜촉 사이로 흘러나오는 잉크색이 짙푸르다. 검푸른 그 빛깔 속에 스며있는 이야기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제인 양 생생히 떠오른다. 오래전 검사와 피의자로 만난 이가 전해준 만년필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검찰로 송치되어 내게 배당되었다. 도로 중앙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피하여 돌아선 사람을 치어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버스가 시야를 가려 사람을 보지 못하고 달리다 그만 사고를 낸 것이다. 조사를 끝낸 후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사람은 12살에 고아가 된 후 넝마주이, 구두닦이, 만년필 행상 등 닥치는 대로 해오다가 프로 권투선수로 데뷔했다. 테크닉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페더급 랭킹에도 올랐다. 그런데 가난한 형편이라 제대로 먹을 수 없어 풀빵 몇 개 먹고 링에 올랐더니 다리가 휘청거려 평소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링을 떠나 다시 조그만 보따리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한편 비행소년의 형, 자매가 되어 선도를 목적으로 하는 청년들의 봉사활동인 BBS운동(Big Brothers and Sisters Movement)에 동참하여 자신과 같은 불우한 처지의 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들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자꾸만 마음이 갔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을 만나 달성공원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하여 딸을 낳자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려고 운전을 배웠는데, 얄궂게도 운전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다니던 회사의 외면으로 피해자와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울먹이며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털어놓는 그를 보니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피의자를 대하지만 그렇게 절망적인 모습을 한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며칠 후 갓난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찾아왔다. 피의자의 아내였다. BBS연맹 회장의 진정서와 경북지사 명의의 표창장을 들고 와선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다 돌아갔다. 남편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알리고 선처를 부탁하러 왔을 텐데,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돌아서는 여인의 뒷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업힌 아기의 방글거리는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열심히 살려다 불운에 빠진 그의 처지가 딱하고 또 딱했다. 상사와 상의하여 그날로 석방하면서 불구속으로 기소하였다. 법과 인정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며 내린 당시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서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현관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벨을 누르지 않고 노크하는 이가 누군지 궁금해하며 문을 여니 그가 꾸벅하며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석방한 피의자의 얼굴을 다시 대하는 일은 그가 처음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오라고 했다. 사건관계인 출입금지의 불문율을 어긴 셈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소파에 마주 앉은 그가 머뭇거리며 포장된 작은 물건을 내민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려운 살림에 보태 쓰라고 펄쩍 뛰며 사양했으나 제발 거절하지 말아 달라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석방 후 집으로 돌아가니 아내는 장기간의 고생을 예견하고 작은 리어카를 사 길거리에서 핫도그 장사를 시작했더란다.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작은 리어카에 매달리는 아내가 불쌍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실컷 울었다고 했다. 어서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며, 그렇더라도 운전에는 영원히 손을 떼겠다고 결심했단다.

교도소에 들어앉아 가족들 걱정에 노심초사했는데 관용을 베풀어준 덕분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며 거듭 고개를 숙인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 외엔 더 바랄 게 없으니 이건 그냥 가져가라고 하니 장사하다 남은 것이란다. 이 은색 만년필을 지니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기에 가져온 마음의 선물이라며 기어코 내 손에 쥐여준다. 간절한 그의 태도에 감동하여 나도 모르게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마침 아내가 방앗간에서 해온 가래떡이 있어 떡국이라도 끓여 먹으라고 싸 주었다. 떡 꾸러미를 들고 뒤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앞날을 위해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가 건네준 만년필은 오랫동안 내 책상을 지키고 있다. 그 만년필로 중요한 서류에 서명할 때마다 간절했던 그의 눈빛이 떠오른다. 사건 하나도 결코 소홀히 대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하는 만년필이다. 그의 덕담대로 만년필이 행운을 가져다준 덕분인지 큰 탈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그가 남긴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어쩌면 그는 내게 또 한 사람의 스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왜 자꾸만 불운이 닥치는지 모르겠습니더. 그러나 돈보다 마음이 풍족한 것이 부자가 아니겠습니꺼.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나보다 더 못한 형편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살 껍니더.”


<한국산문> 20215월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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