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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밤의 외출    
글쓴이 : 봉혜선    20-03-30 09:27    조회 : 3,786

 봄밤의 외출


봉혜선

  현관을 나서자마자 외톨이가 되었다. 올빼미처럼 밤에 나다니는 아들의 꽁무니에 붙었다가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으레 가리라 여긴 전철 방향과는 반대쪽에 약속이 있다며 돌아서 버린다. 혼자는 여간해서 내려올 수 없는 시간, 11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온 힘을 겨우 북돋아 걸음을 옮긴다. 이왕 나선 길이니 봄을 핑계 삼아도 되려나.

낯선 밤이다. 가로등 불빛을 비껴선 검은 나무들이 먼저 눈앞에 다가든다. 아기의 갓 생긴 이빨인 듯 여리고 작은 잎들이 아는 척을 해온다. 무더기가 아니라 낱낱으로 반짝이는 걸 낮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낮에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신다는 나무들은 밤이 되어 산소를 한껏 빨아들이며 자라는 걸까. 숨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생명의 손짓은 힘차 보인다. 허공을 가득 채운 봄 햇빛에 눈이 부셔 보이지 않던 잎들이 봄을 알릴만큼 초록으로 변해 있다. 봄이 겨울의 틈을 비집고 나오듯 용기를 내어 홀로 나와도 좋으리라.

건너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켜진 건널목의 녹색 불에 빨리듯 빨라진 걸음은 봄을 향해 던지는 하트라고나 할까. 가벼워서 붕붕 소리까지 났다. 순찰 나온 교통 경찰차 앞에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얼핏 본 검은 정복이 아직 겨울을 닮았다. 아파트를 벗어나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을 오른쪽에 두고 걷는다. 불빛을 의지할 수 있게 되자 혼자임을 잊는다. 점포마다 얼굴이 된 흰빛, 노란빛들이 오늘따라 조화를 이루어 정답고 따사롭다. 불이 이렇게 밝으니 경계의 마음을 풀어도 되려나, 목까지 여민 지퍼를 조금 내린다.

  결혼 4개월이 안 되었을 무렵 이틀 차이로 학교를 졸업한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먼저 어른이 되었으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터라 당연히 남편과 함께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유학 절차를 밟으며 대학원에 다니던 오빠네는 시간을 다투었으므로 평일도 괘념치 않았다. 남편 나이가 오빠보다 위여서 내심 오빠를 내려 본 것일까. 충청도 어디에서 치른다는 약혼식에 남편은 시간을 내기는커녕 나도 가지 못하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흘 만에 결혼한 나에게 남편은 해가 지면 밖에 나가 있지 말라고 했다. 다녀오면 해가 져 어둡다는 이유였다. 별수가 없었다. 나는 빈집에 갇혔다.

사실은 찹쌀 도넛을 사러 나왔다. 밤에 일부러 나오긴 오늘이 처음이지만 귀갓길의 가족들에게 어지간히 닦달하는 간식 제1번이다. 다리를 다쳐 나다닐 수 없던 한 달 반 동안 무뚝뚝한 가족들이 베풀어 주던 최고의 위문품이기도 하다. 도넛을 얻어먹은 힘으로 먹성 좋은 입들을 위해 아픈 다리를 더 움직여야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빵집에 들어서며 오직 한 가지만 사는 걸 이제는 직원 모두가 알아본다. 제빵사도 얼굴을 내밀어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건너다본다. 때로 없는데 어쩌나?” “이그 다른 것도 좀 사!”라며 챙겨 주거나 새로 온 직원에게 비법 전수라도 되는 듯 알리는 소리도 들었다. 어느새 낯을 익혔는지 선배 직원에게 나도 알아요. 찹쌀 도넛 세 개!” 하며 대꾸하는 소리에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동그란 빵의 부드러움과 팥의 조화는 계절의 변화에도 여전하다. 변덕스러운 사람 사이에선 느끼지 못하는 넉넉한 맛이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든 미소를 보내 본다. 받는 이 없어도 나의 미소가 훈풍이기를 바란다. 저마다 흥건한 봄을 마중하느라 삼삼오오 모인 청년들의 무리가 봄 길에 마구 돋아나는 새싹 같다. 청년들이 크게 웃는 목소리에 얼마 전 두물머리의 물이 풀리는 걸 들은 기억이 불려 올라왔다. 아득하지만 봄 들녘에 오르는 아지랑이를 본 듯도 하다. 어디에라도 녹아들고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움과 안타까움 속에서 느끼던 젊음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내 곁을 떠나는 중이다. 봄이 신록에서 초록으로 변하고 꽃들로 물드는 걸 새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올봄엔 자주 나와 봐야겠다. 연하게 익어 가는 봄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아야겠다. 쓸쓸한 중에도 여전히 새로워지는 봄을 비로소 알겠다. 그 안에 있을 때 안보이던 것들이 지금에야 아름답다. 화가이자 시인인 나혜석은 <노라>에서 나는 사람이라네라고 외쳤다.

2월도 다 기울어 간다. 금요일 밤의 설렘도 가득하다. 아빠처럼 집에 있지 말라는 내 성화에 떠밀리듯 밤 외출이 일상이 된 아들은 오늘도 푸른 봄에 취해 밤을 잊겠지. 때로 어둠이 앞길을 인도하리라.

서울 출생

2019 한국산문 등단

ajbongs60318@hanmail.net

봄나물 모임을 준비하는 마음에 초록물이 번진다.

                                                                                                             (한국산문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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