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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가, 그 유치하고도 달콤한 유혹    
글쓴이 : 나운택    20-02-05 15:05    조회 : 4,474


 유행가, 그 유치하고도 달콤한 유혹

나구름

   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어디서 주워듣고 따라 하기를 좋아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전깃불에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무지개도 밟아 놓고

                (남인수 노래 <<무너진 사랑탑>>중에서)

 

   그 나이에 가사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았을 턱이 없다. 그저 경쾌한 노랫가락이 좋아서 귀에 들리는 대로 흉내 내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위 노랫말 중에전깃불에 맹세한 님댕기 풀어 맹세한 님, “무지개도 밟아 놓고모질게도 밟아 놓고를 그 당시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노래한 것이다.

 

   지금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첨단매체가 발달되어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러 노래들을 접하고 따라 하기 시작하지만, 예전에는 대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학교종>>을 시작으로  <<송아지>>, <<산토끼>> 같은 동요들을 배웠다,  그런데, 이런학교 노래들은 언제나 뭔지 모르게 너무 반듯하고 재미도 없어 따분하게 느껴졌고, 어른들이 부르는 유행가들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노래가 먼 미국 땅에서 건너온 것일 때는 그 걸 따라 부르는 재미가 가히 환상적이었다.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라디오도 한 동네에 잘 사는 집 몇 집에만 있었던 그 시절에 어디서 그런 노래들이 흘러들어왔는지 동네 청년들로부터 주워들은, 뜻은 모르지만 왠지 약간은 불량스러워 보이면서도 멋있어 보이는 그 정체불명의 미국 노래들을 흉내 내곤 했다. “~~퍼서 넘보나~“( 이때 주의할 점은 목을 자라목처럼 약간 앞으로 쭈욱 내밀고, 어깨와 양팔은 약간 반항적이고 불량끼 섞인 듯한 폼을 잡은 후  ~~”에 서서히 힘을 넣으면서 길게 뺀 다음, “퍼서 넘보나~”로 넘어가야 제맛이 난다.),  ~빠빠 룰라! 시스 마이 베이비 아돈미아 베이비하고 목청껏 외치면서 골목을 누비고 다녔었다. 물론 위의 노래들은 ‘Love potion number 9’ ‘Be Bop A Lula. She’s my baby. I don’t mean maybe...’를 귀에 들리는 대로 따라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아는 영어라고는제무시’, ’삐시꾸’, ’도락꾸’ (GMC, B-29, Truck) 정도밖에 없었으니, 이런 노래 가사의 뜻을 알 턱이 없었다. 노랫말이 무슨 뜻인가와는 상관없이 그냥 어쩐지 세련되고 멋있어 보여서 따라 하다 보면, 그 야릇한 어감에서 오는 짜릿한 일탈의 쾌감 같은 걸 느끼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비목>>, <<그리운 금강산>>같은 우리 가곡과 <<! 수잔나>>, << 메기의 추억>>, <<런던대리 에어>>같은 외국 유명 민요 등 아름다운 명곡들을 많이 배웠지만, 그때도 우리의 관심은 늘 어른들이 부르는 유행가에 더 가 있었다. 어쩌다가 오락시간이라도 주어지면 교복 윗단추를 두 개쯤 풀어재낀 채 모자를 삐딱하게 돌려 쓰고는  사랑이란 두 글자…” 어쩌고 하면서 유행가 한 곡씩을 뽑아야 멋있게 보였고, 어쩌다 <<고향의 봄>>, <<사우>>같은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있으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숫제 야유를 받기도 했었다.

 

   젊은 시절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평소엔 무심히 흘려들었던 유행가 가사들이 갑자기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사랑을 할 때나 이별을 할 때면 갑자기 유행가 노랫말들이 자기 얘기인 양 가슴을 파고든다. 비단 연인을 만나고 헤어질 때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희로애락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래는 늘 건전한학교 노래가 아니라 평소에는 다소 유치하고 통속적이라고 느껴지던 유행가들이다.

 

   우리나라 유행가는 그 종류도 다양해서 흔히 뽕짝이라 불리던 트로트에서부터 블루스, 컨트리, 포크, 고고, , 발라드, 폴카, 탱고 등 각양각색의 음악들을 각자 취향에 따라 즐길 수가 있었다.  이미자의 애절함도 좋고, 조용필의 처절함도 좋고, 나훈아의 구성짐, 양희은의 깨끗함, 김세환의 부드러움, 송창식의 시원스러움, 이용의 화사함, 주현미의 간들어짐, 임희숙의 쓸쓸함, 박인희의 잔잔함, 최백호의 스산함, 김도향의 컬컬함, 김정호의 비장함, 강수지의 청순함, 정태춘의 흐물흐물함, 김흥국의 불량스러움, 송대관의 그 촌스러움까지도 모두가 나름대로 다 좋았다. 임재범, 알리의 열창은 중년의 허전한 가슴을 채워주기도 한다.

 

   내 어릴 적 꿈은 저널리스트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함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한 유명 신문사에 시험을 쳤으나 실패를 했다. 얼마 후 다른 언론사에 시험을 쳤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그 언론사 앞 게시판에는 합격자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죄송하지만, 회사가 없어졌습니다.”라는 취지의 황당한 공고가 붙어 있었다. 당시 서슬 퍼렀던 신군부세력에 의해 감행된 소위언론 통폐합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생각지도 않았던 어느 대기업에 취업을 한 후 한 해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이듬해 고대하던 취업시즌이 돌아와 또 다른 유력 신문사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시험 보기로 예정된 날 하루 전에 멀쩡하게 건강했던 내가 회사 근무 중에 갑자기 쓰러졌고 그 길로 병원으로 실려가 한 달여를 사경을 헤맸다. 그때 병상에 누워서 문득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길을 고집하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접어야 했고, 그 후 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하루하루 생업에 충실하면서 살아왔다.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

               길을 잃고 헤매는 사슴 한 마리

 

   나이 쉰을 훌쩍 넘긴 늦가을 어느 날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어릴 적 친구와 소식이 닿았다.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문득 예전 학창시절에 했던 것처럼 옛날식 종이 편지가 쓰고 싶어져서, 백지를 펴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편지글이 신기하게도 술술 잘 써져서, 단숨에 일곱 장을 써 내려갔다. 다 쓴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으면서 문득 뭔가 더 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글 쓰는 직업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소녀의  얼굴처럼 그렇게 불쑥 찾아온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랜 세월 가슴속 깊숙이 꾹꾹 눌려 있던 글을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애초에 종이 편지를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길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먼 길 돌고 돌아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이 길이 원래 내 길이기에.

 

                네온사인 반짝이는 갈림길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고

                잃었던 그리운 길 찾아서 가네.

                (김세환 노래 <길 잃은 사슴>중에서)


* 2019 리더스 테마에세이 <노래, 인생을 조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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