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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진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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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었다    
글쓴이 : 진연후    19-08-19 14:35    조회 : 742

                                                                             바람이 불었다

        진연후

  어디 가고 싶어? 무얼 하고 싶은지, 무얼 먹고 싶은지 묻는 것보다 쉽고 반가운 질문이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마

음 쓸 일 없는 곳.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으니 바람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기대가 되었

다. 태풍 무이파가 휩쓸고 간 직후에 한라산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정상 부근의 데크가 뒤집힌 채로 여기저

기 흩어져 있고 쓰러진 나무들이 뒤엉킨 채로 길을 지워버렸다.

  비옷 소리가 요란하던 성판악 관리소에서 정상은 바람의 강도가 여섯 배나 셀 거라며 올라가다가 스스로 판단해

서 무리하지 말고 내려오라던 당부의 말은 이미 유효시기가 지났다. 한걸음 떼기가 어렵지만 해발 1800m 표지판

을 지나온 지 꽤 되었고, 정상이 멀지 않다. 여기서 내려가야 할까 망설임은 없다. 단지 이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잠시 들었을 뿐이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치는 바람에 갈등할 기회도 놓친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지. 제

주행 비행기만 뜨면 가자고, 입산 금지만 하지 않으면 올라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에 친구의 의도적인 실수가 있었

던 것 같지만 모르는 척 한다.

  구름을 이리저리 흔들고 정신없이 산을 헤집어 놓은 바람을 뒤쫒아 산을 오르는 것에 무슨 특별한 목적 같은 건

 없다. 비바람이 온 몸을 때리고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지만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겠고, 갈증도 느껴지지 않고

 힘들다는 생각도 없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유라고 했던가. 지금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바랄 것도 없고,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편안하다. 이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넓

은 마음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심각한 상황이 닥쳐도 겁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앞서 가고 있는 친구를 믿거라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혼자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걸 생각

하면 대책 없는 자만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내 의지로 어쩌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피할

수 없다는 걸 즐기고 싶어지는 걸까.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니 투정부릴 수도 탓할 것도 없다. 여기서 그

냥 돌아 내려가도 아무 문제없다. 그런데 난 다시 내려올 길을 한 발 한 발 오른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과 거세지

는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놓고 마음을 흔든다. 뭐가 있다고 힘들게 올라가는 거야, 그냥 내려가.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비바람 속에서 이런 몰골을 하고도 마음껏 웃을 수 있겠어. 한번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야. 왜 쓸데없는 것에

 의지를 보이는 거야? 평소에 비 맞고 다니는 거 남의 눈 의식해서 못 해 봤잖아.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거, 이런

 느낌이구나. 웃다가 눈물 나는 거. 몇 시간동안이나 비를 맞고 추위에 떨어도 감기도 안 걸리는 거.

  내 삶에서 이렇게 거센 비바람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열정적인 사람들은 큰 바람 앞에서 더 강렬한 메시지를 듣

기도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서 훗날 거센 바람이 불었던 날을 추억하기도 하던데. 예술가들은 거친 상황에서 영

감을 얻기도 하는 모양이고. 하지만 난 어쩌다 한번 평소보다 센 바람을 마주했을 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열정이라든가 도전 정신이 생긴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날씨가 매우 안 좋은 날 산에 갔다는 게 전

부이다. 하지만 산을 오르면서 본 것도 들은 것도 온통 바람뿐이었던 날 알았다. 입술이 파랗게 얼고 손이 시려서

 입김을 불면서도 바람이 더 세게 불어 백록담을 가득 채운 구름을 걷어갔으면 하고 바랐던 시간만큼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는 내가 아닌 그냥 ‘나’였다는 것을. 그리고 난 그렇게 위로받는다는 것을.......

  사는 일 중의 어떤 것에 미친 듯이 몰입하지 못했다고, 남들 보기에 치열하게 부딪치지 않는다고 눈치 보는 것도

 자책하는 것도 우습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나일 테니까. 의식 속에 학습으로 저장된 안전함에서 벗어났던

 느낌이 다시 흐렸다 개였다 하는 날이 이어지고 밋밋하게 생긴 대로 사는 날들 속에서 가끔씩 꺼내보고 싶은 기억

으로 남을 것 같다. 무엇을 보았는지 묻기에 태풍 지나간 길에 남아있던 바람을 실컷 맞았다고 했다. 미쳤어. 나는

 그 소리가 맘에 든다. 여간해선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한국산문. 2012년 4월호. / 선수필. 2012. 여름. 여름수필4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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