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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밀밭에 부는 바람    
글쓴이 : 김단영    19-02-16 21:02    조회 : 4,757
   호밀밭에 부는 바람(한국산문 18년6월호).hwp (31.5K) [1] DATE : 2019-02-16 21:37:26

호밀밭에 부는 바람

김단영

 

  호밀이 자라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호젓하게 들판을 거닐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울주군 삼남면 소재지로 출근한 지 한 달가량 되었다. 삼남은 상북에 비해 평지가 너른 편이다. 상북에도 호밀을 심은 농가가 더러 있긴 하지만 삼남만큼 잘 자라지는 못했다. 삼남의 들판 길은 자전거 타고 달리기에도 좋았다. 회사 구석진 곳에서 방치된 자전거를 발견했다. 녹도 조금 슬었고 타이어 바람도 느슨했지만 걸어서 산책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어린 호밀은 그냥 풀처럼 보였다. ‘숙맥(콩과 보리)불변은 아니더라도 양맥(밀과 보리)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특히 어린 풀일 때는 전문농사꾼이 아니면 식별하기 어렵다. 사실은 농촌으로 이사 온 지 제법 오래된 나도 회사 직원이 호밀이라고 알려주어 호밀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날마다 점심시간이면 호밀이 자라는 풍경을 바라보곤 한다. 그것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땅도 아니고 내가 키우는 호밀도 아니지만 호밀밭 풍경을 흐뭇하게 감상하는 시간은 온전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람에 산들산들 나부끼는 호밀밭을 스쳐지나가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J.D.샐리저, 호밀밭의 파수꾼(민음사)

 

  가슴 찡한 구절이다. 나도 그런 희망을 꿈꾸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열린 수업을 한다거나 아동을 위한 책을 쓰고 그리는 그런 희망 말이다. 잠시 독서지도사로 일할 때 아이들이 마냥 좋았다. 그때는 아이들의 순전함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기성세대에 완전히 편입되어버린 것 같다. 농촌에 살다보니 아이의 숫자는 줄어들고 어르신들만 나이 들어가신다. 호밀밭은 있으나 거기에 뛰어 노는 아이들이 없다는 것도 쓸쓸한 일이다. 이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호밀밭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며 그 파수꾼의 역할도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호밀밭으로 데려와 직접 구경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밀은 일반 밀에 비해 키가 크게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반추동물의 먹이로 키우는 농가가 많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호밀 농사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새로 일하게 된 직장이 소 사료를 만드는 공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사료를 판매하고, 그 공장에서 발생하는 경비를 관리하는 일이다. 6일 근무에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조건임에도 굳이 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동문학은 아이더라도 글쓰기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었기에 일도 일이지만 소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출근을 하고 보니 신입으로서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재관리와 경리업무를 다년간 해왔기에 업무파악은 그럭저럭 해나갔지만 한우 사육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지라 새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사료를 판매하기 위해서는 초식동물의 섭생과 사료의 성분까지 두루두루 꿰고 있어야만 했다. 직접 사러 오는 손님도 있고 배달 주문하는 전화도 걸려왔다. 근무시간에는 종일 바빴지만 특히 아침시간에 업무가 편중되었다. 오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신없이 전표를 끊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한숨 돌리며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한 달 동안 호밀은 쑥쑥 잘도 자랐다. 바람에 몸을 흔들며 제법 푸른 파도를 만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김수영 님의 시도 생각났다. 첫 출근을 하던 삼월에는 하얀 봄꽃들이 건 듯 부는 바람에도 꽃비가 되어 흩날렸다. 빛바랜 동백 꽃잎이 계절의 무게를 못 이겨 툭툭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그 사이에도 호밀은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 쑥 내음, 냉잇국, 떡 찌는 냄새, 밀 익는 냄새인지 풀이 자라는 질박한 토향이 들녘에서 불어왔다.

  호밀밭 귀퉁이에는 빈한한 풀꽃들이 피고 지고했다. 자전거를 잠시 멈추어두고 낮은 자세로 땅을 가까이 살펴본다. 꽃다지, 민들레, 봄까치꽃, 자운영, 제비꽃까지.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빈한하다 할지 몰라도 서로 다투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제 역할을 다한다. 풀꽃의 겸허한 일생이다. 지켜보는 이 없어도 저 혼자 피었다 저 혼자 고요히 진다. 바람이 불면 불어오는 대로 몸을 눕혔다 일으키는 민초들이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순응하는 풀꽃들의 삶을 바라본다. 신은 어쩌면 그를 더 귀히 여기고 예뻐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풀꽃처럼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닐진대 민초들의 삶은 때때로 굴곡진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순하게 살다가도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거칠게 저항하기도 했다. 민초들은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치열하게 삶을 살기도 했다.

  자전거로 동네 산책을 몇 번 다니다보니 어느새 사월이 되었다. 업무의 인수인계도 끝났다. 환절기라 밤낮의 기온차가 심했다. 벚꽃은 지고 복사꽃이 발그레 피어나기 시작했다. 호밀은 벌써 내 허리춤까지 키가 자라 곧 이삭을 피울 것 같다. 어느 날은 비가 왔고 또 어느 날은 바람이 억수로 불었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긴 호밀대가 몸서리치는 날도 있었다.

  나의 호밀밭은 시와 소설이 있는 풍경이다. 돌아보면 지난날 세상살이에 그리 날렵하게 살아오진 못한 것 같다. 가슴에 담아놓았던 말 다 쏟아내면 저 호밀밭에 부는 바람 같을지도 모르겠다. 내 나이도 익어 이젠 마음 한쪽 옆으로 무엇이든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음의 바위너설이 무뎌지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산문 2018년 6월호(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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