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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지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글쓴이 : 홍정현    18-06-21 17:28    조회 : 5,151

벽지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쿵’하고 쓰러졌다. 내가 올라서 있던 의자를 넘어뜨린 녀석은 저만치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울보였지만, 그날은 울지 않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바로 일어나, 의자를 세우고, 바닥에 뭉개진 분필들을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의자 위에 올라서서 새 분필을 들고 칠판에 주훈(週訓)을 적었다.

그해 담임은 정말 무서웠다. 이제 겨우 열 살인 칠십여 명의 아이들은 그 앞에서 바짝 긴장했다.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은 아침마다 교실 앞으로 나가 일렬로 서서 맞았다. 그는 얇은 플라스틱 자를 튕겨 아이들의 뺨을 때렸다. 반장, 부반장은 두 배로 맞는 것이 규칙이었다. 나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반장이었고, 어른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기에, 그 체벌은 수시로 나를 떨게 만드는 공포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공포는 담임의 당직 날이었다. 그는 당직 날 나를 학교로 불러 잡다한 일들을 시켰다. 텅 빈 학교 교무실에서 그와 나란히 앉아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맞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어렸을 때 기억은 망각의 바다에 떠 있는 섬들 같다. 몇 가지 장면들만 집요하게 남아 풍선처럼 부풀어 수면 위에 동동 떠 있다. 사건보다는 그때의 감정이 더 도드라져 어딘가 일그러져 보이는 기억의 조각들. 그러니깐, 나의 열 살은 공포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장면은 모두 어둡고 스산하다.

그날 담임이 시킨 주훈 적는 일을 빨리 끝내야 했다. 아프다고 울거나, 날 넘어뜨린 아이를 담임에게 고자질하면 하교 시간이 미뤄진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였다. 학교는 불안한 장소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넘어졌지만 피가 나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집에 오니 몸이 이상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엄마에게 학교에서 넘어진 이야기를 했다.

“머리를 부딪쳤어?”

나는 끄덕였다. 엄마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약을 먹고 안방에 누웠다. 온몸이 축 늘어지고 스르르 눈이 감겼다. 꿈과 현실을 반반씩 섞어 놓은 곳을 떠다니는 듯했다. 그곳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렀다. 반복적인 영상이 되풀이되었다. 고양이라고 생각되지만 고양일 수 없는 것을 어루만졌다. 어루만진다는 행위도 만진다는 행위 같지 않았지만, 그곳에선 그런 것들이 당연하고 타당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에 놀라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고양이를 몇 번 만졌을 뿐인데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신 것 같았다. 화가 많이 난 손님이었다. 대충 짐작이 갔다. 낮에 우리 집 전화벨을 계속 울리게 만든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수화기 속에서 아빠가 있는 곳을 당장 말하라고 거침없이 소리 지르던 사람.

거실에서 빚, 부도, 경매 등의 단어가 들려왔다. 엄마는 손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어디에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라고. 그는 아빠가 올 때까지 우리 집에 있겠다고 했다.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운이 없었지만, 약을 먹어서 그런지 두통은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거실로 나가 이제 좋아졌다고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아파서 잠을 자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그저 눈을 깜빡거리며 벽만 바라봤다. 통증을 누르고 있는 약 때문인지 눈을 깜빡거리는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나는 눈을 끔벅 감았다가 떴다. 벽엔 70년대 유행했던 연한 금색의 곡선 무늬가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내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뜰 때마다, 벽지의 무늬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나는 또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와있었다. 눈 쌓인 언덕 아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는 것이 무섭지는 않았다.

언덕 아래쪽에 안방 벽지가 보였다. 금색 무늬가 가득한 벽지. 벽지의 무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무늬들은 호흡하듯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벽지 앞까지 내려간 나는 춤추는 무늬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멀리 언덕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의 손님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보풀처럼 ‘웅웅’ 날리더니 서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그랗고 단단한 눈 뭉치가 되어 나를 향해 굴러 내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다른 소리들도 들려왔다.

담임이 아이들 뺨을 찰싹거리며 때리는 소리, 빈 교무실 밖 휑한 복도를 울리는 차가운 바람 소리, 의자를 넘어뜨리고 도망간 남자아이의 히쭉거리는 웃음소리, 아빠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으면 학교로 찾아와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던 수화기 속 빚쟁이의 목소리.

소리들은 나풀나풀 눈송이처럼 날아 들어와 굴러오는 눈 뭉치에 더해졌다. 눈 뭉치는 점점 거대해졌다. 도망가야 했다. 벽지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사라진 고요가 폭신하게 느껴졌다. 나는 벽지 속으로 폴짝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둥글게 말린 등 뒤에서 벽지의 금빛 무늬들이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고 있었다.

 

 

?에세이문학?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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