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세먼지는 좋음, 평론반 출석률도 좋음,
호주에서 젊은 새 회원이 오신 것도 좋음,
꽃이 피듯 꾸준히 새 식구가 늘어가니 좋음,
좋은 일들이 많은 5월입니다. 보고픈
몇몇 분들이 안보이니 조금 안 좋음...그러나 미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문학 공부는 계속 이어집니다.
라파예트는 아들 이름을 조지 워싱턴으로 지었다. 얼마나 존경했으면 그랬을까.
미국 독립 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라파예트, 그가 조지 워싱턴을 만난 것은 20살 때였다. 용기병(Dragoon)중위였던 그는 매년 실시하는 부대 훈련을 메츠(Metz, 로렌 지역)에서 하던 중 현지 사령관 초청 만찬에 참석 했을 때 미국의 대영 반란이 화제였는데 그는 “내 마음이 이미 빼앗겼고 깃발 아래 참전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 동기는 아버지가 영군에 의해 죽은 것, 프리메이슨 회원 정신 등으로 추측. 주변의 갖은 반대와 방해 물리치고 승리호(La Victoire)로 출발(1777.4.20.)
청년 라파예트는 영어도 서툴고 경력도 별로지만 열정적이고 겸손하여 워싱턴에게 호감을 사고 12월에는 라파예트에게 장군 지위를 부여받자 “I am here to learn, not to teach.”라고 응수. 헌신적인 전투에 소장 계급.
1778.3, 프랑스는 정식으로 미국 독립전쟁 지원하고 참전했다. 헌신적이고 용맹하게 전투하여 대륙회의로부터 “gallantry, skill and prudence”란 찬양받았다.
라파예트는 워싱턴과 함께 영국군에 맞서 싸우면서 전투 지휘 능력을 키워나갔다. 더 많은 군인과 함대, 보급품이 필요 하자 1779년, 라파예트는 프랑스로 돌아간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라파예트를 직접 만나 미국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라파예트는 프랑스 최정예부대원 6000명을 받아 냈다.
1780년, 라파예트는 원정군을 이끌고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과 함께 영국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독립전쟁 최후의 전투인 요크타운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는 라파예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라파예트가 조지 워싱턴과 미국 독립운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백악관 앞의 라파예트 스퀘어 등 미국 전역에 수십 개의 라파예트 이름을 딴 도시와 대학, 기념비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2부) 합평
이영옥/국화 리/민경숙/이문자(월평)/하광호/김숙(월평)/소지연(존칭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