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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 위 드림    
글쓴이 : 김영도    21-08-29 22:59    조회 : 2,707
   쉘 위 드림.hwp (92.0K) [0] DATE : 2021-08-29 22:59:42

쉘 위 드림

김영도

 

붉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젊은 여자가 걸어온다. 어정쩡한 중년의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Shall We Dance?”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엉거주춤하게 손을 잡고 걸어 나간다. 무대 중앙에서 둘이 스텝을 밟자 음악이 시작된다.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춤을 춘다. 남자의 얼굴에서 어색함과 쭈뼛거림이 사라지고 환한 웃음이 퍼진다.

2000년에 개봉되었던 일본 영화 Shall We Dance?의 마지막 장면이다. 스기야마는 평범한 도시의 중년 남자다. 단란한 가정과 안정된 직장이 있다.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성실함이다. 하지만 쳇바퀴 같은 일상의 무기력에 빠져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댄스를 통해서 생활의 활력을 되찾게 된다. 남편의 불륜을 의심했던 부인도 진실을 안 후에는 남편을 응원한다. 자기 마음을 돌보지 않고 살아 온 중년 남성의 자기 발견을 그린 영화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도 사교댄스 열풍이 일고 있었다. 그때까지 댄스는 제비족춤바람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불온한 날개를 달고 음지에서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권장되는 취미 생활로 새롭게 거듭나는 중이었다.

아침방송에서 부부가 함께 배우는 사교댄스를 소개했다.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고 우울증에 좋다. 모든 관절과 근육을 사용하는 전신 운동이다. 비만, 신경통, 골다공증, 무릎 관절염, 신경성 질환의 예방에 좋다라는 의학 전문가의 견해에 패널들도 거들었다. “신체접촉이 많으니 부부가 딱 제격이다. 부부가 함께하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지름길이다.”라고 입을 모아 강력하게 추천했다.

남편에게 우리도 배우자고 했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딱 잘라 거절했다. ‘저런 건 40대나 되어서 하는 거지. 우린 너무 이르지’ ‘그래, 그렇기는 하다. 좀 나이가 들어서 하자.’라고 넘겼다. 삼십 대인 우리는 불혹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뿔싸, 사십 대는 모든 것을 이룬 완성의 나이가 아니었다. 한창 벽돌을 쌓아야 하는 숨 가쁜 나이였다. 남편은 회사에서 영역을 굳히기 위해서 밤낮없이 바빴다. 난 두 아이를 키우는 이른바 워킹맘이었다. 춤은 고사하고 옆을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버거웠다.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한숨 돌리고 보니 오십 줄이었다. 남편과 둘이 남게 되자 허전함이 몰려왔다. 사춘기보다 무섭다는 갱년기가 우울의 손을 잡고 왔다.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했다. 우쿨렐레연주를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밤새 직소 퍼즐을 맞췄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마다 남편에게 함께 하기를 권했으나 모든 것에 시큰둥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으면 늘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도 무얼 해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늘 허기진 상태였다. 취미 유목민의 방황을 끝내고 문학공부를 시작했다. 딱 맞는 옷을 입은 만족감으로 허한 마음이 비로소 채워졌다.

여전히 별다른 의욕이 없는 남편이 신경 쓰였다. 남편에게서 스기야마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권태로운 성실함. 삶의 활력을 다 잃은 고사목이 될 거 같았다. 햇빛에 찰랑거리는 무성한 잎을 가졌던 나무였다. 어린 새들이 그 품에 둥지를 틀고 비바람을 피했다. 새들이 떠나가자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잎을 하나씩 떨구더니 이제는 제 몸조차도 말라가는 것 같았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 남편 핸드폰이 연이어 카톡 소리를 냈다. 대학 동아리 선후배로 이루어진 단톡방이다. 한 선배가 활을 쏘자고 했다. 뜬금없이 웬 활이라며 뜨악한 나와 달리 남편은 눈이 반짝거렸다. 핸드폰이 쉼 없이 울어댔다. 국궁의 역사. 카본 궁과 죽 궁의 차이. 20파운드와 25파운드의 특징. 전란 때 보인 사수의 뛰어난 활약상이 쏟아졌다. 카본 궁 두 세트를 구입하고, 후배가 과녁을 만드는 것으로 기나긴 논의가 끝났다. 남편은 동영상을 보면서 자세와 이론을 공부했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저녁을 먹자마자 활을 들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빈 축구장에서 날마다 백발의 활을 쐈다. 며칠 새 실력이 좋아졌다고 땀범벅인 얼굴이 벙긋거렸다. 따라가서 동영상을 찍어줬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진지한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사람이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 가장 섹시하다는 말이 맞았다. 단톡방에 선배와 남편의 활 쏘는 모습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갔다. 한 후배가 형들을 보니 왜구가 쳐들어와도 끄떡없겠다는 농을 했다. 국사학과 출신끼리나 하는 우스갯소리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가족 단톡방에도 영상과 사진을 올렸다. 어깨 조심하시라는 아들의 걱정. 멋있다는 사위의 추켜세움. 엄지 척을 날리는 딸의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남편은 곧 날개 달고 날아갈 판이었다. 춤을 진정으로 즐기게 된 스기야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고사목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매일 출사를 하던 남편은 보름이 채 지나기 전에 화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궁사의 어깨가 처졌다. 화살을 더 주문했다. 이제야 즐길 거리를 찾아 생활의 활력을 되찾은 참인데 그깟 화살이 대수란 말인가. 어깨와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는 날까지 남편의 활쏘기는 계속될 것이다.

 

젊을 때는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지천명이 지나고 남편의 손에는 주몽의 화살이 들려있고, 내 손에는 허난설헌의 붓이 들려있다. 스기야마와 마이처럼 두 손을 마주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보았던 스기야마의 뿌듯함이 우리에게도 가득하다. 영화의 부제를 떠 올려본다. ‘다시 한번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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