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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언덕을 지나    
글쓴이 : 김시현    20-08-05 14:10    조회 : 2,421
   바람의 언덕을 지나(7월).hwp (19.5K) [0] DATE : 2020-08-05 14:10:29

   2년 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칼라우에아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가 갈 예정지는 칼라우에아 빅아일랜드 섬 동부 쪽 끝이라 여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하였지만, 호놀룰루 쪽으로 휴가 겸 피서를 위해 45일 동안 지내다 오는 일정으로 변경하였다. 와이키키 해변을 끼고 있는 호놀룰루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여유 있게 해변을 걸어보고 충분한 휴식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다음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누아누 팔리에 있는 바람의 언덕 전망대를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하나우마 베이 해변에서 호핑투어도 하고 이 기회에 하와이 어디엔가 살고 있을 K 권사님과 연락하여 일정이 허락한다면 만나 보고 싶었다.

  호놀룰루의 아침은 바다에서 빨강 머리를 내밀며 해가 떠올랐다. 해변을 따라 조깅의 즐거움을 만끽할 때였다. 노숙자들이 바닷가 벤치에서 해가 뜰 때까지 단잠을 자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휴식하며 띄엄띄엄 나누어져 잠에 빠져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잠을 청하는 사람과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곁에는 겨우 몸만 덮을 수 있는 이불과 가벼운 짐보따리가 하나씩 있었다. 자연이 주는 혜택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전해진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들과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같이 맞이하고 있던 셈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좋은 공기와 햇살은 노숙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미국 서부를 여행했을 때,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정문 앞에 노숙자들을 보았다. 나라에서 지정해준 지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 대학가 앞에서 본 노숙자와 유럽에서 보았던 노숙자는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호놀룰루 노숙자는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며 나름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노숙자도 머무르는 곳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 보였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대자연 앞에 노숙자들은 분명 그들만의 여유로움과 미세먼지 없는 좋은 환경에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 여유와 짐의 무게는 생각의 한 끗 차이임을 느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많은 짐을 챙고 삶의 무게를 감당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덮을 이불과 가벼운 짐보따리 하나로 살아가는 저들의 삶의 방식이 차라리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게으르고 불성실하거나 현실도피의 나태함이 아니라 홀가분하게 보였다. 인생의 여유로움이 주는 행복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그들도 누리고 있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오후 우리는 바람의 언덕 누아누 팔리 전망대에 올랐다. 가장자리에는 안전을 위하여 높은 담을 쳐 두었고 그 아래는 짙푸른 바다와 협곡의 끝없는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소문대로 거세고 강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긴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얼굴을 때렸다.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은 한쪽으로 쏠려 작대기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다. 내 몸은 바람에 떠밀려 비틀거리며 날아갔고, 강하게 부는 바람에 휩쓸려 곧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전율과 공포감이 밀려왔다.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 울타리 너머 바다를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더위와 묵은 체증 같은 답답함이 바람을 타고 한방에 떨쳐 나가는 호쾌함을 느꼈다. 드센 바람에 유쾌한 웃음을 실어 보내며 묘한 치유 효과와 함께 짜릿하고 아찔함 뒤에 통쾌하고 홀가분한 마음에 평온함을 느꼈다. 우리는 일정 중 시간이 되면 한 번 더 올라오자고 약속하며 바람의 언덕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길에 와이키키 해변에 내려앉은 저녁노을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마주했던 하늘은 찬란하고 황홀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바람의 언덕을 다녀온 다음 날 아침, 호핑투어 장비를 챙겨 하나우마 베이에 있는 바다로 갔다. 하와이를 배경으로 찍은 애니메이션 <모아나>바다파랑을 뜻한다. 주인공 모아나처럼 모험은 할 수 없지만, 호핑투어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산호초가 있는 바닷속을 요리조리 숨어다니며 헤엄치며 놀고 있는 형형색색의 물고기 꼬리를 따라 정신없이 호핑투어에 빠졌다. 하나우마 베이 하늘과 바다는 파랑빛이었다. 하늘이 물 아래로 스며든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내 손을 파랗게 물들일 것 같았다. 수정처럼 맑은 물을 먹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순간적으로 일을 저질렀다. 혀끝에 닿자마자 엄청난 짠맛이 하고 반사작용을 일으켰다. 이 어이없는 행동을 보고 딸아이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못 말리는 엄마라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물을 한 손에 담아 딸에게 뿌렸다.

   여정이 지날수록 K 권사가 궁금하여 하와이까지 온 김에 안부라도 전하고 싶어 SNS로 메시지를 보냈다. 교회 사랑방을 통해 친숙하게 알고 지냈던 터라 우리 일행을 꼭 보고 싶다는 회신이 왔다. 시내 일정만 남았던 우리는 빌렸던 자동차를 반납한 상태인지라 간절한 초청에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시내버스를 타고 방문하였다. K 권사는 알라모아나 근처에서 한 살 연하 남편 글렌과 살고 있었다. 창문이 유독 많은 단층집이었다. 맞바람이 통하게 설계된 낮은 집은 앞뒤로 문을 열어 두면 에어컨을 켜놓지 않아도 시원했다. 거실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잔디마당으로 연결되어 있어 아파트에서 베란다 나가는 것처럼 높낮이가 없었다. 마당 한쪽에는 창고와 빈 닭장이 있었고 아보카도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권사님은 전날 마트를 다녀왔다며 우리 일행을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마련하였다. 한국 음식이 그리웠을 거라고 입맛을 돋우는 비빔국수를 준비하였다. 친정엄마와 딸처럼 도란거리며 권사님을 도왔다. 우리는 이야기가 있고 정성이 깃든 밥상을 마주하며 웃음이 넘치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나의 여동생은 권사님과의 모습을 보고 친정엄마와 딸 같다며 부러워하였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글렌은 파란 눈을 끔벅이며 난감해하면서도 투정과 불만이 없었다. 먹기 곤란하냐고 묻는 권사님에게 고개를 저으며 소년처럼 환하게 웃음꽃을 선사하였다. 우리말을 잘 몰라도 표정을 읽고 반응을 보여 줄 때마다 인자한 인상은 우리네 품 넓은 정이 많고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우리에게 마당에 함께 나가자며 아보카도를 주고 싶어 했다. 그는 장대를 들고 고개를 젖혀 높이 달린 아보카도를 땄다. ‘하고 떨어지는 경쾌한 소리에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따뜻한 곳에서 자란 아보카도는 젖먹이 머리만 한 크기였다. 어릴 적 외갓집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따주었던 외할머니처럼 추억에 젖어 들게 하였다. 글렌은 주렁주렁 달린 아보카도를 손짓하며 마음껏 따서 가져가라고 했다. 비행기에 실을 수 없어 하나로 만족하며 선물로 하나씩만 챙겼다.

   권사님은 점심을 먹고 떠날 채비를 하던 우리에게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자주 찾는다는 카일루아 해변을 꼭 보라고 일러 주었다. 80세 노령이라 권사님은 동행하기 힘들다 하여 우리 일행만 가기로 하였다. 카일루아 비치는 호핑투어와 윈드서핑을 즐기는 마니아들만 찾는 곳이었다. 아기자기한 느낌보다는 레저를 즐기기에 좋은 남성적인 느낌이 나는 바다였다. 우리 일행은 모래 해변을 걸으며 파도를 타며 윈드서핑을 즐기는 것을 구경만 하여도 멋지고 즐거웠다. 파도에 숨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조마조마하다가 파도를 타고 나타날 때면 안도의 함성을 질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권사님을 떠올렸다. 권사님은 젊은 시절 성공하리라는 꿈을 안고, 미용 기술을 배워 혈혈단신 미국으로 향했다. 혈기 왕성한 꿈많았던 처녀였다여권 문제로 미국에 살아남기 위해 32살에 글렌과 결혼을 하였다. 2  정도 살다가  권사님과 맞지 않아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고국에서도 삶이 뜻대로 되지 않자 16년이  지나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때 친구들로부터 글렌의 소식을 들었다. 페인트공이었던 그는 작업 중 점심 먹으러 사다리를 내려가다 굴러떨어져 혼수상태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남편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 권사는 매일 병원을 찾았다. 16년 전에 헤어졌던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아 극진히 보살폈다. 영화나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글렌은 극적으로 깨어났고 친구들을 통해 권사의 헌신적인 간호를 알게 되었다. 자신을 떠나 버렸던 여인을 원망하지 않고 생명의 은인이라며 청혼하여 재결합하였다. 그 후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노년에 교회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슬하에 자식이 없다. 서로를 의지하며 알콩달콩 욕심 없이 살며 태생은 달라도 따뜻하고 진솔한 그들의 삶에서 바람의 언덕을 지나온 연륜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하와이에는 영혼까지라도 날려 버릴 것 같았던 누아누 팔리 전망대 바람의 언덕 추억과 인생의 바람의 언덕을 지나온 내 마음속의 그 섬에는 권사님과 글렌이 있다. 그들은 나를 딸처럼 대해 주었고 동행했던 일행에게까지 온정을 베풀며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다시 하와이를 찾을 때는 호텔에 묵지 말고 자기들 집에 머물러 달라고 하였다. 그 초대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하와이는 꼭 다시 가고 싶다. 하지만,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없는 코로나 19 때문에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여 지독한 더위를 식혀 주고 심신을 치유해 주었던 바람의 언덕을 향하여 주문을 걸어본다. 온 세상 코로나 언덕에 청정하고 기운찬 바람을 일으켜 코로나 19 감염병을 하루속히 날려 보내 달라고.

   코로나가 해결되는 날 이 시대의 진정한 노마드가 되어 호놀룰루 해변을 마음껏 달려보고 싶다. 하나우마 베이 바다에서 호핑투어를 하며 모아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K 권사와 글렌의 마당에 아보카도는 잘 자라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누아누 팔리 바람의 언덕에 올라 바람결에 일상의 묵은 답답함을 훌훌 날려 보낼 그 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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