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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수 나빠 좋았던 날    
글쓴이 : 허문홍    19-08-22 10:38    조회 : 705
   운수 나빠 좋았던 날.hwp (18.0K) [0] DATE : 2019-08-22 10:41:22

 

                                                                        운수 나빠 좋았던 날

 

                                                                                                                                                     허문홍

 

  부활절 하루 전, 수필동아리(수수밭) 합평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십여 년 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모임을 마치고 시간 여유가 남자, 긴 시간 들여서 어렵게 온 서울을 또 언제 오겠냐 싶어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어느 지역을 방문하든 그곳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곳 박물관은 꼭 가봐야 한다던 나였다. 그런 내가 우리나라 최대 박물관을 아직 가보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여정.

  종로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주소가 용산이란 이유로 용산역으로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잘못된 정보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용산역에 내려 아무리 둘러보아도 국립중앙박물관이란 표지판은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길을 묻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쉬이 틈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헤매던 눈에 들어온 것은 안내데스크라는 큼지막한 글씨.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길을 물었다.

  “걸어가기는 힘드실 테니 1번 홈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이촌역에서 하차하세요.”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는 말이 덧붙었다. 심한 길치로 유독 그쪽으로는 맹한 구석이 두드러지는 나. 그래서 내 귀조차 믿지 못해 재차 확인하고서야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가니 죽 늘어선 여러 개의 개찰구가 보였다. 그중 왼쪽 맨 끝에 자리한 1번 개찰구.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마침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보이는 지하철. 너무 반가운 마음에 별생각 없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순간 낯섦이 밀려왔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알던 전철의 구조보다는 기차의 구조와 더 가깝게 생긴 좌석의 배치. 거기서부터 의심을 했더라면 잘못된 긴 여정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무지가 너무도 무모하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기 마련, 그때가 그랬다.

  ‘, 요즘 지하철은 좌석이 이렇게도 생겼구나. 세상 좋아졌네.’

  그리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젊은 커플이 다가와 자신들의 좌석이라고 했다. ‘? 지하철에 정해진 좌석이 있다고?’ 얼른 자리를 비키며 든 싸한 느낌은 적중했다. 창 위를 보니 절대 지하철에서는 볼 수 없는 좌석번호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다음 내 눈에 띈 것은 전광판 위의 춘천행이라는 단어였다. 뒤이어 들린 안내방송도 춘천행 기차임을 알렸다.

  그 순간, 뭔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안 나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내원이 얘기해 준 것인데 설마…….’ 라는 헛된 믿음에 기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창밖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지나치고서야 나는 비로소 어리석은 믿음을 포기하고 한 청년을 붙들고 물었다. 역시 기차는 춘천행이었지만, 청량리역에서 하차하면 그나마 꼼짝없이 춘천으로 끌려갈 운명은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 텅텅 비어있는 좌석을 보면서도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엉덩이를 비빌 수 없었다. 혹여나 청량리역을 놓칠까 봐 선 채로 통로에 서서 두 눈 부릅뜨고 창밖을 주시하며 제발 청량리역에 무사히 내릴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드디어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안내 방송과 함께 서둘러 내린 나는 벽에 붙은 노선표를 확인했다. ‘이촌역을 확인했지만, 미덥지 않아 지나가는 한 이십 대 여성에게 재차 묻고서야 다시 지하철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또 다른 기차로 바쁜 마음에 얼른 올라탔다. 하지만 곧 불길한 두 줄 좌석을 보고 덜컥 겁이 나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근처에 서 있던 40대 후반쯤의 남성에게 이걸 타면 이촌역으로 갈 수 있냐고 물었다. 아니라는 답과 함께 이어진 설명은 두 개의 기차가 있는데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로 내 머릿속은 멍해졌다. 그때 잔뜩 낙담한 내게 온화한 얼굴의 한 중년 부인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이촌역 가세요?”

  얼른 그렇다고 대답하자 기다리면 이촌역으로 가는 지하철이 곧 올 것이라고 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자신도 그 역으로 간다고 말해 주었다. 그제야 안도한 나는 용기를 내어 지하철이 오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 부인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처음 두 정거장은 그녀가 지인과 함께여서 나에게까지 대화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지인이 내리고, 궁금했던 것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혹시 이 철로를 기차와 지하철이 같이 사용하나요?”

 그러자 그녀는 그렇다며 원래 운행하던 중앙선은 지하철이 되고, 경춘선이라는 춘천 가는 ITX 열차가 생겨 같은 철로를 사용한다고 말해 주었다. 지하철이 아닌 춘천행 기차를 탄 것이 내 얼뜸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되자, 용산 안내데스크의 어설픈 안내와 용산역의 불친절한 표지판에 순간 화가 났다. 속상한 마음에 여차여차해서 청량리역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자 부인이 따뜻하게 웃으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심지어 젊은이들조차도 간혹 그런 실수를 한다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자 사르르 녹아내린 화. 그렇게 내 마음이 풀리자 그녀가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통영이요.”

  , 통영, 정말 아름다운 곳이죠. 무척 마음에 들어 몇 번 가 봤어요.”

  참 이상한 것은 내가 사는 고장을 아름답다 표현하는 말을 들으면 이내 내 마음결조차 고와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갑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 보니 그녀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천주교 신자이고,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남 고성이 내게는 통영으로 오기 전 5년을 살았던 곳이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우연이 겹치며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다 싶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이리 엮고 저리 엮으면 다 엮인다더니 정말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굳이 엮자니 그렇게 엮이는 것이지 그녀와 나는 오늘 이외 단 한 번도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곳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인연이 소중하다 보니 그 이전의 스친 우연들 또한 단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가슴 속에 반성이 밀려왔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과연 이렇게 고마운 인연으로 남은 적이 있었던가?

  그녀와 따뜻한 담소를 나누며 서 있었던 지하철의 그 자리는 편안했다. 혹사당한 다리며 터질 것만 같던 방광조차 그녀와 함께인 순간에는 고통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촌에 살다 춘천으로 이사 간 그녀가 그날 하필 부활절을 맞아 옛 성당이 그리워 찾아온 것이,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을 운명이었나 보다며 활짝 웃는 우리들의 귀에 이촌역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에 내려서도 친절하게 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고서야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참을 더 걸어 박물관에 도착하자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듯했지만, 두 다리는 더 힘차졌다. 돌고 돌아온 여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며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가슴 깊이 다짐 하나를 품었다. 그 어느 날 어떤 이의 운수 나쁜 날, ()가 나를 만나 그것이 오히려 운수 나빠 좋았던기억 하나 될 수 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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