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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    
글쓴이 : 정양이    19-07-23 18:18    조회 : 947
   사주.hwp (17.0K) [0] DATE : 2019-07-23 18:18:59

                                                                                           

                                                              사주

 

 

                                                                                                                                                                                정양이

   

  차표 한 장 들고 버스에 올랐다. 가다 보면 바다에 닿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창밖을 내다본다. 멀리 베일에 싸인 푸른 산머리가 구름에 흩어져 희미해진다. 어느새 고별의 바람을 맞은 야산의 나무들이 말라가는 잎을 소리 없이 떨구고 있다.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다 거둔 시선을 손에 든 책에 던진다. 김남희가 말하는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심란하게 흘려 쓴 제목이 눈길을 붙잡는다.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에 의문이 걸리며 문득 차창 밖에 스쳐가는 나무를 바라본다.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외가에 가는 길에서도 자꾸만 뒤로 달아나던 나무의 모습이 아쉬워 유리문을 긁적이던 생각이 떠오른다. 잡아매고 싶어 뒤돌아보던 허전함, 멀어져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골똘했던 유년의 시선을 지천명에 들어선 이 나이에 버스에 올라앉아 데자뷰처럼 불러 세우는 것은 왜일까. 시간은 생각에도 옷을 지어 입히나 보다. 이제는 두꺼워진 피부만큼이나 생각들이 층층이 쌓여가는 것을 어쩌랴. 우리는 쌓아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쌓아 가면 무거운 것을. 사념을 내려놓고 싶어 머리를 흔든다. 그 바람에 덜컹거리며 버스가 멎는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간다.

  늦가을의 쓸쓸함이라도 팔아보겠다는 듯 반색하는 구멍가게 주인의 시선을 털어내며 모래밭으로 들어선다.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신발에 또 다른 옷을 입히는 모래알들. 걸음을 잡고 늘어지는 그들을 굳이 떼어내려 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관심이라 생각하며 무례를 범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걷는다. 슬며시 다가와 거품으로 사그라드는 파도, 이 모든 것들로부터 위안을 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마음을 다독이며 바다를 바라본다.

   무심코 지나가는 바람처럼 오고 감에 연연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잡았던 손을 놓을 때면 늘 바다로 달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바다는 내 상념의 부스러기를 받아 주었다. 하나를 보내면 다시 다가오는 인연의 고리. 멀리서부터 출렁이며 하얀 파도가 몰려든다. 모래사장을 덮치고 스스로 사라지는 거품,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쏟아냈을 희부연한 사연들이 일렁거린다.

   홀로 간다는 것. 나를 돌아보는 일이지 싶다. 밀려드는 외로움을 벗 삼아 살아온 삶, 해변이 배경인 그림 속 한 점 인양 걷는다. 오른발 왼발 번갈아가며 따라오는 발자국이 덩달아 갯바위로 오른다. 살아온 날들이 활동사진처럼 머리를 스친다.

  고명딸로 태어나 남자 형제들과 부대끼며 얻어진 보호색을 옷처럼 입고 살아온 날들이었다. 대쪽 같은 아버지는 원리 원칙으로 그어놓은 사정권 안에서 코르셋처럼 빈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스며들었고 삶의 관계 속에서 벽처럼 다가왔다.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타협보다는 제 살을 깎아내는 몸짓으로 싫은 것과 좋은 것에 대해 드러내는 단호한 표현들이 상대에게는 상처였으리라. 아니라는 생각에 머물면 뭐든 단칼에 베어버리는 방식으로 수없이 비교하며 버렸다. 스스로 상처 받으면서도 굳어진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 손을 놓아야 했던 인연들, 그렇게 굳어가는 마음을 허물어내는 것이 버거워 혼자서 맞는 바람을 달게 받았으리라. 그 뒤안길에 드리운 그늘에는 오기가 웃자라 무한히 자유로워야 할 내 젊은 날을 경직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대학교 도서관에서 시침이 자정을 넘어가며 늘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슬며시 다가와 내가 넘기려던 책장에 지그시 눌러쓰는 커피한잔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 올려다 본 순간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의예과 2학년이라는 그의 진한 부산 사투리에 강한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그가 건네는 커피 한잔의 따듯한 향기에 조금씩 익숙해 지고 있었다. 진한 커피색 어둠이 내려앉은 캠퍼스 벤치에서 그와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어가는 종이 잔의 여백을 채워 주었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동안 발그레진 수양버들은 선선한 바람에 그네를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룸메는 나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고 대놓고 물어볼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해 버린 나는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오만으로 다 식어버린 커피를 버리는 날이 겹쳐가고 있었다. 그에게 던져야할 물음이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던 어느 날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해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고향인 부산으로 떠났다. 그 역시 간수에 굳어가는 두부처럼 소통되지 않는 나와의 기류를 피해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으리라. 송송 뚫린 마음을 달래며 도서관내 책들이 빼곡히 줄지어 서 있는 숲길을 걸어가다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책,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집어 들었다. 우선 두툼해서 맘에 들었다. 종강여행을 반납하고 자취방에 틀어박힌 나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그 날도 나는 바다를 찾았다. 한없이 넓은 바닷가에 서니 눈앞이 흐려지고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바다는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곤 수없이 밀려드는 물살로 지워내고 채워주는 역할도 마다치 않았다. 쌓았다 허물어버리는 모래성처럼 생각의 탑들이 솟아오르고 스러져가면서 바다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주었고 나는 가벼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멈칫한다. 날아오르는 갈매기 날개의 무게가 바람의 결을 따라 나뉘어 흩어진다. 만남과 헤어짐이 또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저 바람은 알고 있겠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별이 몇이고 그 무게는 얼마일까?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전제하는 것. 버리고 다시 주워가는 푸념을 들어주며 바다는 큰 바위 얼굴처럼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언의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가며 속 깊은 마음을 나누어 준다.

   언젠가 장난삼아 짚어본 사주에는 천고가 들어있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독. 그때부터였을까. 외로움을 갖고 태어났다는 자조 섞인 독백으로 살아온 것이․․․․․․․. 자기 암시를 통해 다져진 고독. 서럽게 울어대는 파도로부터 위로 받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온 내 모습을 바라본다. 바다의 고독에 기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파도는 고독을 들어 올려 바위를 감싸며 하얗게 흩뿌린다. 아픔을 삼키는 물방울이 슬며시 손등을 어루만진다. 내 천고가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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