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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안에서 바라보는....(2020년 추보문학상 가작)    
글쓴이 : 이하재    20-09-02 12:57    조회 : 6,185
전염병환자가 되어

 어느 누가 병에 걸리고 싶어 병에 걸릴까. 병이 들고 싶어서 병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피하고 싶은 게 질병이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라면 병을 피해 멀리 도망이라도 다닐 텐데 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사람이라면 딱한 노릇이다.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을 피하면서 살 수는 없다. 누가 환자인지 표시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전염병의 확산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발병된 신종바이러스 코로나19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인간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을 선포하여 세계적 대유행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일부 지방과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가 숨고르기를 하는 양상이다.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던 유럽과 미국의 심각한 상황과 비교하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나라는 근년에 신종플루와 사스, 메르스 등 전염병과 일전을 벌였던 경험이 있어 코로나와의 싸움에서도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다. 환자와 직접 대면하면서 고생하시는 의료진은 물론 관계당국과 국민들의 협조가 어우러진 결과다. 다른 나라보다 먼저 승리의 깃발을 올리리라 믿지만 코로나19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전염병의 여파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가장 고생하고 힘든 사람은 환자다. 병으로 인한 고통은 환자만이 느끼는 아픔이다. 다른 사람은 부모나 자식 그 누구라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통증과 정신적인 아픔이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 좌절감이 들고 무기력해진다. 몸은 점점 까라지고 살고자하는 의지마저 꺾이게 된다. 더욱이 심각한 전염병이라면 피해의식으로 세상이 더 원망스럽게 된다.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내가 걸리다니 운명을 탓하고 나에게 병을 옮아준 그 누군가를 저주하게 된다.

 전염병환자들은 이름이 없다. 대신 번호표를 부여받는다. 1번 환자, 2번 환자 등으로 확진판결을 받는 순서대로 호명된다. 관리차원에서 도움이 되어서인지 공식적인 발표를 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환자의 급증으로 천 단위가 넘자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총계만 발표하고 지역별로만 몇 번째 환자라고 한다. 환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환자의 인권을 위해서일 것이다. 내가 전염병환자라는 사실을 이웃들이 안다면 이웃들은 나를 어떻게 대할까? 이웃이 전염병환자인 줄 안다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전염병환자였다. 신종바이러스 같은 처음으로 접하는 병은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혀 온 박테리아 전염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전염병이었다. 정체를 알면서도 마땅한 치료약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천대받다가 죽어갔었다. 가족한테도 외면당하고 거리를 떠돌다가 서서히 어느 낯선 땅에서 하늘을 원망하며 눈을 감아야 하는 설운 병이었다. 나는 언제 누구로부터 감염이 되었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전염병환자라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첩첩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도시로의 유학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마곡사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이 십리 길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반달음질로 가야 지각을 면했다. 책보자기에 도시락까지 싸서 어깨에 메고 다니는 통학길이 열세 살 어린나이에 힘이 부쳤나보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지쳐갔다.

 무릎에 이상이 왔다. 시큰거리며 오므리고 펴기가 불편하였다. 다리를 뻗은 상태로 발을 질질 끌며 다녔다. 공부에 욕심이 있어 학교는 꼬박꼬박 갔었다. 하교 길에는 친구들이 나를 번갈아 업고 다녔다. 집에 올 때는 멀리 떨어져 있는 큰 마을까지 친구들과 함께 올 수가 있었다. 몇 달이 지났을까 무릎은 저절로 좋아졌다. 부모님은 다행이라 여기실 뿐 어떠한 약도 써주지 않으셨다. 그대로 멈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를 표적으로 삼은 세균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즐기며 내 몸을 집요하게 공략하였다.

 일 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부터 손가락이 굽었다. 아주 천천히 왼손가락이 구부러지더니 여름이 되어도 반듯하게 펴지지 않았다. 아무런 통증도 없이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고 갈퀴처럼 굽어졌다. 작은 콩알도 왼손으로는 주워 담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불편은 하였지만 아픔을 느낄 수 없으니 이 또한 다행이었다. 삼 학년이 되었다. 고등공민학교는 정규중학교가 아니라 고입자격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 합격증이 필요하였다. 바보같이 공부만, 바보 같이 하였다.

 우의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던 놈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이 괴로웠다.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저 괴로웠다. 눈썹이 하나 둘 빠졌다. 책 속에도 공책 속에서도 눈썹이 보였다. 밥을 먹을 때는 밥 속에서 물을 마실 때는 물속에서 눈썹을 골라내며 먹었다. 왼 손등에 부풀어 오른 물집은 가라앉지 않았다. 밤이면 가위눌리고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병이 점점 진행될수록 나는 큰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정신적으로도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었다.

 “엄마! 나 XX병에 걸렸나봐.” “얘가 미쳤나보네.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엄마는 단호했다. 엄마는 열한 식구의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일곱 새끼의 어미일 뿐이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을 게다. 나는 자는 척 하며 말했다. 잠꼬대처럼 왼손을 잘라버리겠다고 하였다. 부모님도 큰 결심을 하시고 병원에 가보기로 하였다. 1969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공주시의 ‘이용주병원’으로 갔다. 열다섯 살 병이 생긴 지 삼 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병원에 갔었다.

 병원장의 안내로 보건소에서 진찰을 하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부모님은 하루 권장량의 배가 되는 약을 먹도록 하였고 나는 심한 빈혈로 비틀거리며 지쳐갔다. 보건소의 진찰을 부정하고 싶으신 아버지는 대전시의 유명하다는 한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 다시 진찰을 받았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의사에게 학교에 다녀도 괜찮은지 물어보았고 의사는 당연하다는 듯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절망하였다. 내가 전염병환자가 되어 학교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파란 꿈은 물거품처럼 사그라졌다. 몸도 괴로웠지만 학교를 그만 다녀야 하는 게 몹시 슬프고 서러웠다.


 부모님은 집밖으로 소문이 나면 집안 혼사 길이 막힌다며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도록 형제들에게 입단속을 시키시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현대의학의 발달이었다. 죽음으로 귀착되었던 몹쓸 병이었지만 진행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병들기 이전의 몸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고 평생 관리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회에 진출했으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축시켰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였다.

 병은 널리 자랑을 해야 치료하는데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면 내놓고 자랑하기란 쉽지 않다. 집안에 환자가 있다면 쉬쉬하고 숨기며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전전긍긍하기 마련이다. 전염병환자는 죄인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함께 살아야 할 우리의 이웃이다. 전염병에 걸리고 싶어 병든 사람은 없다. 깊이 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영혼을 갉아먹는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우어 주어 환자들이 정신적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